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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한성 수복부터 성왕 전사까지의 부분에 대한 생각- 역사 잡상

 삼국사기에는
 성왕 -> 고구려랑 허구~헌 날 싸우고
 그런 가운데서 신라는 "단독으로" 고구려 10개 성을 탈취했고 백제 동북쪽 땅을 빼앗은 후에 관산성 전투가 일어났다고 하고 있죠.
 재밌는 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싸우고 있었다는 거

 반면 일본서기에는
 백제에서 왜에 계속 지원군을 요청하고
 가야 문제를 두고 신라와 다투고 있었으며 (백제가 점령한 안라가 고구려, 신라와 내통한다느니 뭐라느니)
 백제가 신라, 가야랑 같이 한강을 회복하고 - > 이 쪽이 통설이죠
 신라는 고구려랑 화친했고
 백제는 한강 이북을 포기했고 그 자리를 신라가 차지했으며
 그런 가운데서 관산성 전투 발발
 도도가 성왕 죽이면서 "약속 어긴 놈은 노비 손에도 죽을 수 있다"

 흐음....................................................................................... -_-a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무령왕 대에 한강 쪽의 지명이 나타나는 것도 있었고
 성왕은 허구헌날 고구려랑 싸우면서도 가야 지방을 점령하고 있었죠.

 이런 걸 보면 무령왕 때부터 성왕까지는 계속 고구려랑 엎치락 뒤치락 뺏고 뺏기고 혈전을 벌이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그런 상황에서 일본서기에는 성왕 때 원군 요청이 정말 많습니다.

 두 곳에서 계속 싸우고 있었으니 동성-무령왕 때 좀 회복됐다 해도 한계까지 갔겠죠.
 반면 신라는 고구려와 크게 싸우지 않은 것 같구요. 백제에 원군도 좀 보내준 것 같고. 왜의 공격도 이 땐 아예 끊긴데다 지증-법흥왕 버프로 신라의 전력은 최상. 

 이렇게 보면...

 백제-신라-가야 연합군의 한강 수복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 중에 나온 일 아니었을까요? 대승을 거뒀으니 거기까지 밀고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좀 운빨로요.
 하지만 백제는 그 곳을 차지할 정도의 역량이 다 떨어진 상황이었고, 계~속 싸웠으니까요. 한편 고구려도 내분에다 (일본서기의 추군 세군 대립) 북쪽 돌궐과의 전쟁 때문에 여길 다시 뺏을 정도의 힘은 없었구요.

 이 때문에 화친한 신라에게 이 지역을 먹는 걸 묵인한 거 아닐까요?
 나제 동맹의 계획적 (백제는 하류, 신라는 상류 먹자) 인 진격이 아니었다면 백제가 물러난 상황에서 신라가 하류까지 먹은 것도 이해가 되고, 성왕으로서는 분통 터지겠지만요.

 이런 상황에서 한강 유역이 신라 땅과 고구려 땅으로 나눠져 있고, 각기 불가침 비스무리한 거였다면 그 이후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싸운 게 이해 가죠. 백제는 열 받아도 신라까지 칠 상황이 아니었겠고, 고구려도 신라 건드릴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다 왜에서 1000명이나! 되는 -_-; 원군이 오자 성왕은 신라랑 한 판 붙자고 생각했을 거구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성 공격이 관산성 전투 전이라면 백제가 명백히 신라를 공격하게 된 거죠. 그 전에 "이제까지 한 거 봐 줄테니까 고구려랑 싸우자" 했는데 진흥왕은 쌩~

 그러니까
 백제는 너무 힘을 썼다가 겨우 먹은 한강도 포기할 정도로 힘이 없었고
 신라는 그 틈을 타 고구려와 화친하고 양 쪽 다 지친 틈을 타 한강을 먹었고
 성왕은 일본에서 원군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라 공격한 거고

  그런데............ 신라의 영웅 킬.

한줄 요약. 나제 동맹의 한성 수복이 계획이 아니라 우발적인 거였다면 그 전후의 상황이 어느 정도 설명되는 것 같은데요.


  ----------------------------------------

 대충 요렇게 정리해 봤는데 -_-a 얼마나 맞을까요.
 일본서기 참 재밌네요. 앞뒤 수식이 참 아스트랄해서 그렇지, 삼국사기에 비해 자세한 부분이 참 많아요. 통설 중에도 일본서기 쪽 내용인 게 참 많구요. 삼국시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지 재 보려면 일본서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물어보면 될 듯.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게 한성 수복이랑 연결돼서 뭔가 진격의 의지처럼 느껴지지만... 그 위치나 이런 전후 상황을 보면 오히려 후퇴 같아요. 뭐 나라를 재정비한다는 점에선 맞겠지만, 한성으로의 북진 고토 회복 이런 거랑은 관련 없는 천도인 듯.

그리고 나제 동맹 후의 상황을 보면 남선경영설이 말도 안 되는 게 확실히 느껴지네요. 뭐 따로 포스팅해봐야 헛소리 포스팅만 여러 개 올릴테니 하지 않겠습니다.

덧글

  • 을파소 2011/12/16 21:24 # 답글

    안장왕과 한주이야기도 그 엎치락 뒤치락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죠.
  • 눈시 2011/12/17 01:19 #

    설화일 뿐이긴 하지만 그게 또 있어서 머리가 더 아프더라구요 :)
  • 초록불 2011/12/16 22:23 # 답글

    지나치게 대담한 가정이라고 봅니다.

    땅을 내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다른 나라 군대가 와서 점령하는 것을 묵인한다는 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나 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 눈시 2011/12/17 01:19 #

    흐음 그럴까요 ㅠ 하긴 제대로 결론이 안 나는 사건이니 -_-a;
    어렵네요
  • 명림어수 2011/12/17 00:38 # 삭제 답글

    백제와 신라의 북진과 한강유역 점령이 미리 면밀하게 계획된게 아니라는 것까지는 맞는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열전에도 백제가 먼저 공격해 승기를 타고,
    이를 예의주시하던 신라가
    북진을 한 것으로 되어있죠.
    현실적으로도 누가 한강하류의 평야를 넘기고 강원도의 산악지역만 차지하는 데 동의하겠습니까?
    유지비도 건지기 힘들텐대요.
  • 눈시 2011/12/17 01:20 #

    열전을 안 봤군요 이런 =_=; 거칠부 쪽 보면 되나요?
    확실히 하류 상류 노나먹기는 아닌 것같습니다.
  • TheodoricTheGreat 2011/12/17 01:32 # 답글

    백제 성왕의 죽음 장렬하군요.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m_001r_0160_0530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 눈시 2011/12/17 01:46 #

    삼국사기에는 비장이라 돼 있죠. [원래 노비였다->말을 키우는 자를 그 때는 그렇게 천하게 봤다(후라고 다를 건 없겠지만)] [장수였다->지방의 장수를 그렇게 천하게 봤다] 이런 걸로 또 나뉘더군요. 뭐 노비였다가 이 공으로 장수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요.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이 뒷부분까지 보면 정말 장렬한 죽음이었습니다.
  • 굔군 2011/12/17 01:39 # 답글

    저번에 '삼국 영토 개이빨설(?)'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혹시 이 가설이라면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ㅋㅋ

    http://kyonkun.egloos.com/2811809
  • 눈시 2011/12/17 01:51 #

    안 그래도 글 쓴 다음에 둘러보다가 봤었는데요 ^^; 확실히 후삼국시대 때도 다른 지역 다 항복하는데 혼자 반기 들고 그러기도 했으니... 각기 한강 유역에서 각기 다른 지역에 각기 다른 성을 두고 각기... 하아;;;
    저러면 진짜 한반도에 있었다는 수백개의 성들 하나하나의 유적유물들이 다 나오지 않는 이상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 같네요. 상상이 가는 듯 하면서도 가지 않네요 =_=;;
  • 누군가의친구 2011/12/17 04:28 # 답글

    그러저나 성왕의 전사가 결과적으로 김유신의 가문에 득이 되었죠. 전사 당시 상황이 격려차 적은 호위병만 데리고 간건데 정보가 센건지 직감인지 모르겠는데 그 길에 김무력이 매복하였고 결과는...(...)
  • 눈시 2011/12/17 14:28 #

    그게 참 재밌었죠. 가야 출신이니 거기 지리 잘 아는 것도 아닐 텐데요. 뽀록 한 번 (...) 그리고 그 덕분에 그 손자도 잘 나가게 되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 디스키 2011/12/17 14:13 # 삭제 답글

    나제 동맹 후의 상황을 보면 남선경영설이 말도 안 되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간략하게나마 (사실은 자세하게) 답변해주실수 있을까요?
  • 눈시 2011/12/17 14:23 #

    역밸 보면 아시겠지만 남선경영설로 자기 비판하는 사람 차단하면서 누가 떡밥 던지면 글 서너개씩 던지는 사람이 있어서 안 올렸었죠; 이것도 댓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하나하나 따져보면요.

    나제동맹시기 ->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신라가 일본을 배신하고 고구려에 붙었다가 다시 고구려 배신하고 일본에 붙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5세기 말까지는 백제-가야-신라의 반 고구려 동맹이 가장 잘 됐던 시절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신라를 도와주지는 못 할 망정 (삼국사기에는) 4년 동안 왜가 계속 침략해 옵니다. 신라의 왕성인 월성까지 포위당하기도 했죠. 신라가 겨우 왜의 침략을 이겨내니까 고구려가 공격해오고, 포항인 미질부까지 밀렸었습니다.

    -_-; 무슨 자기 속국이 고구려에게 먹혀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무령왕의 전남 점령 -> 전방후원분이 등장하는 건 딱 이 때입니다. 나제동맹이 고구려 때문에 가장 힘들 때도 아니고,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서 성왕이 죽을 때도 아닌, 백제가 좀 살 만해졌을 때 전남 쪽에 일본계 유물 유적이 등장하는 거죠.
    전방후원분을 일본이 백제 땅에 군사기지를 만든 흔적이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시점에 있는 겁니다. 가야, 신라, 백제 어디에도, 어느 시대에도 없이 딱 이 시점에만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저는 이 전방후원분이 오히려 남선경영설을 부정하는 근거라고 봅니다. 일본이 어떤 식으로 진출했든 딱 이 때, 이 시기밖에 안 된다구요.
    백제가 전남을 먹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려서 어느 정도 땅을 줬든가, 아예 일본 호족이 백제에 망명해 왔든가겠죠. 곧바로 일본계 유적이 사라지는 건 바로 백제에게 동화됐다는 것일 거구요.

    일본서기에서는 이 부분을 "일본이 백제가 불쌍해서 전남의 자기 땅을 나눠 줬다"고 돼 있습니다. 불쌍해서 자기 땅을 나눠주는 그 시점에 유적으로 남을 정도의 흔적이 남는다는 건 설명이 되지 않죠
  • 눈시 2011/12/17 14:30 #

    그리고 성왕 때. 성왕은 허구헌날 일본에 구원을 청합니다. 540년부터 계속요. 너무 많아서 불쌍할 지경이죠. 그런데 그 조건이 백제가 일본에 뭘 바치는 게 아니라 (물론 일본서기에는 바치는 걸로 나왔고, 그렇게 자기에게 아주 유리하게 썼음에도) [교환]이었습니다. 그것도 백제의 학사들을 먼저 보내서 애원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지원군이 오면 바로 보내준다는 거였죠. 성왕이 일본 하나에만 매달리는 상황에서도, 일본서기의 기록인데도 이 정도면 속국이라 생각할 수 없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겨우 1000명만 보냅니다. 무령왕 때, 한창 널널할 때 전남에 정착할 정도로 잘 나갔던 놈들이 몇십년만에 백제 최악의 위기가 닥쳤는데 겨우 천 명이었죠.

    역밸에서 남선경영 떠드는 분은 그거 가지고 "배후에서 조종한 거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왜"와 "백제" "가야"가 철저히 분리돼 있습니다. 헌데 초기에는 그들이 모두 신라를 공격하지만, 후반에 가면 가야, 백제밖에 없죠. 임나일본부가 있다면, 가장 잘 나갈 때, 백제와 가야가 강해서 일본군이 별로 필요 없을 때는 왜가 신나게 등장하고, 정작 나중에 가야나 백제나 망할 때 돼서, 한반도의 영토를 잃을 위기가 코 앞에 닥쳤는데 안절부절하기만 하면서 병력도 1000명, 가야가 멸망할 때는 아예 한 명도 못 보냈죠.

    뭐 이런 정도일까요? ' ';; 사실 남선경영설은 애초에 반박됩니다만; 일본서기를 보니 이렇게 자세히 반박이 가능하겠구나 생각해 본 겁니다 ^^;
  • 디스키 2011/12/17 17:08 # 삭제

    하나하나 따져주셨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 혁신한국 2012/04/10 01:25 # 삭제 답글

    글쓴분의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내용을 가지고 분석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 저의 생각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한국인들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생각들중의 하나가 "고구려가 무엇때문에 백제와 신라를 병합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수시로 제시를 하더군요. 헌데 이는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한 이유는 "倭"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보다 큰 이유였지요. 물론 그 倭가 현재의 일본 열도를 말하는 것인지는 추적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4세기 이전의 일본 열도는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倭의 식민지였던 전라도 지역과 일본의 큐슈지역의 인구와 병력만으로 한반도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추론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당시의 倭는 매우 큰 규모의 세력을 자랑하던 존재였습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고구려 광개토 대왕 비문을 보면 "倭가 낙랑과 대방을 공격을 하여 이를 구원을 하였는데, 목을 벤 숫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나옵니다. 적어도 "어마어마한 병력이 북상"을 했다는 것이죠. 전체 인구가 병사로 활용이 된 것이 아니었다 한다면 이들 역시도 전쟁이 가능한 연령대, 젊은 청년층들로 구성이 되었을 것인데, 당시 倭의 전쟁기록과 전쟁대상들을 보면 전라도 지역의 인구와 일본 큐슈지역의 인구만으로 가능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충분히 가질만 합니다. 전 중국남방국과 동남아를 연합한 특정한 국가가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옹관묘와 석실묘를 쓰는 연합국인 거죠.

    적어도 이들 倭세력은 끊임없이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하여 북상을 할려고 계획을 했었고, 고구려에 있어서도 최악의 견제대상이 바로 이들 倭였습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倭의 근초고왕에 의하여 목이 잘린 역사가 있는 국가입니다. 고구려조차도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세력이 바로 倭였던 것이죠.




    倭는 끊임없이 북진을 계획했고 실행을 했었던 국가입니다. 굳이 그렇게 꼭 북진을 해야 했던 이유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단순한 영토 확장을 위한 목적에서였는지, 아니면 종교적, 혹은 역사적으로 북진을 해야만 했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들의 북진의 역사는 단순히 백제 성왕당시에만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저 힘이 미치지 못해서 못했을 뿐이죠.

    그랬다가 성왕때가 되면 그 절호의 시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바로 돌궐제국과 고구려가 전쟁에 돌입을 하게 되죠. 즉, 고구려가 전 병력을 돌궐을 막고 있을 때, 후방에서 치고 올라가면 백제는 손 쉽게 고구려를 멸망을 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헌데 그 시기가 신라 최고의 성군이라고 알려져 있는 진흥왕때였습니다. 외교전술에 관한한 신라 역사상 최고의 영웅인 인물이죠.

    당시 백제가 단독으로 북진을 해서 올라가도 상황은 무방하다고 볼 수 잇었습니다. 문제는 백제가 북상을 하게 되었을 때의 신라의 동태였죠. 성왕은 신라의 세력이 강성함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함께 치자는 제의를 진흥왕에게 수도 없이 하게 되죠.

    허나, 진흥왕은 풋내기가 아닙니다. 번번히 성왕의 요청을 거부를 하고, 신라의 거부로 백제의 북진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보고 고구려는 신라와 손을 잡게 되죠. 倭의 북진을 막아달라는 요구가 그것이었습니다. 고구려로부터 이러한 제의를 받은 진흥왕은 성왕이 다시 요청을 했을 때에 성왕과 손을 잡게 됩니다. 즉, 이때 백제와 고구려 모두와 손을 잡았죠.

    성왕이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을 하여 평양까지 점령한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와있습니다. 헌데 그 시기에 신라가 또 희한한 행동을 보이죠. 바로 임라를 공격을 하여 합병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임라는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던 신라의 고대영토죠.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임라를 공격을 한 신라는 倭인들을 모조리 도륙을 낸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의 기록을 보면 신라에 대한 쌍욕이 등장을 하죠. 신라가 倭대신들을 아주 처절하게 난도질했다라고 표현을 해놓고 있습니다. 신라의 倭에 대한 혐오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임라가 신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자, 倭는 성왕에게 부랴부랴 임라 수복을 명령을 하게 됩니다. 힘들게 평양까지 점령했던 성왕은 어쩔수 없이 전 병력을 이끌고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후퇴를 하지만, 신라를 당장 공격할 병력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倭에 병력을 요청을 하게 되죠.

    그리고 신라와의 확전을 막기 위해 진흥왕에게 자신의 딸을 조공으로 바칩니다. 화친의 조건이었죠. 진흥왕은 이를 수용을 하고,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었던 한강유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을 합니다. 백제가 버려둔 땅이라면 이는 다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죠. 고구려는 한강유역과 북강원도 일대를 신라에게 밀약의 조건으로 할당을 하게 됩니다.

    즉, 신라가 당시 성왕과 함께 북진해 올라가면서 마운령 일대의 땅을 공격을 하여 획득을 한 것이 아니라, 임라를 정복하여 백제군을 후퇴를 시키는 것에 대한 성공의 보상으로 한강유역과 마운령 일대의 땅을 고구려로부터 내려받았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즉, 倭와 고구려를 분리를 시켜놓는 보상으로서 신라가 이들 영토를 획득을 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의 교과서와는 다른 의견인 것입니다.


    딸을 화친의 조건으로 내건 성왕의 실제 목적은 倭로부터 원군이 요청하기를 기다린 것이죠. 그리고 倭군이 도착하자마자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신라토벌군을 조직을 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기습 공격을 합니다. 즉, 신라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죠. 신라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황에 빠져들게 되고, 창이 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들은 성왕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에 응원을 가기로 합니다.

    헌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상황이 나오죠. 바로 성왕이 전쟁터에 방문을 한다는 것이 가야 김씨인 김무력의 귀에 들어간 것입니다. 누가 그 행보를 가야 김씨들에게 흘렸느냐가 또한 재미있는 분석거리가 되겠습니다.

    첩보를 입수한 김무력은 소수의 별동대를 매복을 시켜놓게 되죠. 그리고 성왕은 매복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목이 잘리어 죽게 되고, 이때 목을 잘랐던 고간도도는 "신라에서는 약속을 어기면 귀한 신분이라도 노의 손에 죽소"라고 일갈을 하죠. 즉, 배신한 백제의 행동을 일갈을 하고 성왕의 목을 잘라버린 것입니다.

    성왕이 잡혔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창이 전군을 들어 성왕을 구원하러 갔지만 역시 매복과 동시에 신라군이 대대적으로 반격을 하게 되면서 전 병력이 모조리 붙잡히게 되죠. 그리고 모조리 참살당하게 됩니다. 말 한마리도 살려보내지 않았다고 하죠. 신라는 극심한 倭혐오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신라가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려고 했었을 때, 신라가 차마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 이유가 또한 일본서기에 나와있습니다. 바로 倭와 직접적으로 교전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을 염려를 한 것이죠.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도 倭는 굉장히 무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니었다면 倭와 전면전을 치룰 각오를 해서라도 백제를 그 당시에 통합을 해버렸을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백제 전 영토를 석권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였던 것으로 분석을 합니다. 바로 倭와의 전면전을 꺼려했던 것이죠. 그 정도로 倭의 세력이 대단히 강력했음을 당시 고구려와 신라가 함께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倭는 한국의 전라도 지역과 일본의 큐슈 지역만을 놓고 倭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훨씬 광대한 영토가 당시 倭에 속해 있었으며, 이들의 병력조달규모는 고구려와 신라 전체인구를 오히려 능가했던 것으로 전쟁자료를 유추해보면 추정이 가능합니다. 즉, 남녀노소를 모두 포함한 고구려와 신라 인구보다 倭가 한반도에 상륙시킨 병력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입니다.

    倭의 고이왕을 보면 낙랑과 대방, 고구려를 혼자서 맞아 싸운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경기 충청의 인구, 그리고 병력으로 이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 시기에 韓과는 교전이 없었을까요? 韓을 무찌른 후에 낙랑, 대방을 공격을 하였던 것이고 구원하러 온 고구려와도 전쟁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倭의 근초고왕대가 되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버립니다. 엄청난 병력이 이 당시에 한반도에 상륙을 했다라는 것이죠.

    문제는 이 정도의 병력조달은 한반도 倭인 전라도 인구와 일본 큐슈지역의 인구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倭세력은 동아시아 일대에 세력을 두고 있었던 엄청나게 넓은 세력권이었습니다.

    그 세력권에 당시의 韓이 편입이 되었다 한들 결코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식민지배를 받았다 한들,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倭를 전라도와 일본 큐슈 지역으로 국한에서 볼려고 하다보니, 감정문제로 발전되어 정확한 역사 규명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어지는 것이지요.
  • 신라좆같아 2014/12/31 22:10 # 삭제 답글

    이래서 신라가 싫어
  • 신라좆같아 2014/12/31 22:10 # 삭제 답글

    이래서 신라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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