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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권 출간을 앞두고... 역사 잡상

 실록에서는 미로 찾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무시무시한 분량으로 가득 찬 글들, 충분히 번역됐음에도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들 -_-; 찾아도 찾아도 의문은 남고, 지금 쓰는 말과 그 때 쓰는 말이 다르며, 멋드러지게 쓴다고 이 표현 저 표현이 등장하는 통에 하나의 사건을 찾으려 해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옛 사람들은 대체 말을 왜 그리도 길고 길게 한 건지 - -...

 그래도 그 사건에 관련된 것을 다 찾고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면 미로에서 탈출한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그러고도 찾고 찾고 또 찾아야 된다는 거지만. 그렇게 열심히 찾았다 생각했는데 내가 못 찾은 걸 알게 됐을 때의 당황이란 -_-;

 실록이 정말 좋은 점은 후대의 평가가 아니라 당대의 모습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떤 말을 했고 그게 당시 어떤 평가를 받았으며 뒤에는 또 어떤 얘기가 됐는지 등의 과정을 정말 어렵게 알 수 있다. 사초를 선택해 실록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도의 주관성이야 다른 사료에 비교하면 아주 작을 뿐. 박시백 화백도 이렇게 말 하지 않았던가. "수정실록을 만들어도 기존의 실록을 없애지 않은 게 대단하다"고.

 실록이 번역되고 대중에 공개되면서 끼친 영향은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을 다룬 수많은 대중교양서들은 이 책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을 두고 실록에서 몇 개 짜깁기만 하면 일단 눈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글이 완성된다. 품질을 올리기 위해서는 찾고 찾고 또 찾고 또 평가하고 다른 사료도 보고 연구한 책과 논문들도 봐야 되겠지만, 직접 한문을 해석한다는 어마어마한 단계가 축소됐으며, 히키코모리에게는 직접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된다 (...) 는 메리트를 제공했다. 거기다 아직 부족한 게 느껴진다 해도 그 검색의 힘이란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역시 큰 문제가 있으니... 실록 내용의 일부만 가지고 왜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른 사료들은 결과와 후대의 평가가 적혀 있는데 반해(그리고 이 때문에 생긴 왜곡도 있지만) 실록은 그 때 그 때의 일들이 모두 적혀 있기 때문에 딱 중간까지 끊으면 훌륭한 왜곡이 가능해진다. 원균옹호론이라든가 원균옹호론이라든가 원균옹호론이라든가...

 예를 들면 "A를 B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아주 미친 말이고 어리석은 놈들이나 하는 짓거리며 어쩌구저쩌구"를 맨 앞에서 끊으면 "A는 B라고 생각한다"가 되며 이 사건 혹은 사람을 증오하던 사람은 그걸 감싸는 걸로 멋지게 변신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에 그러니까 원균옹호론이라든가 원균옹호론이라든가 원균옹호론이라든가... 다른 사료들도 (그 사료 자체가 이런 왜곡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그런 경우가 많겠지만 실록의 힘이란 건 꽤나 크니까.

 원균옹호론은 정말 대표적인 경우고 (이건 실록 번역 전에 나온 것이기도 하고) 학계에서든 재야에서든 이런 오류들은 정말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이제 개개인의 노력에 따라 직접 알아차리고 고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니...

 그런 면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혁명이었다. 무조건 실록, 뭘 해도 실록, 다르면 실록 위주로. 어떤 걸 집어들어도 실록을 정말 열심히 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관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면 일단 다른 책들보다는 그의 책을 먼저 들여다본다. 미로 찾기의 첫 번째 열쇠이다. 최소한 정치사만큼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고 그 흐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존의 이런저런 통설들을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실록의 내용과 비교해보며 이상하게 느껴질 경우 그 의문과 자기만의 답을 아낌 없이 내놓는다. 그리고 그 주장의 완성도는 결코 낮지 않다. 야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흔히 퍼졌던 기존의 상식이 자연스럽게 반박되고 (중종과 조광조의 주초위왕이나)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이런저런 주장들도 쉽게 알려지게 된다. 

 왕 한두 명당 한 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압박이 있지만, 이런 수준의 내용이 만화라는 쉽게 볼 수 있는 매체로 나왔다는 것도 참 대단한 점이다. 이전까지의 교양 만화란 드라마 등의 유행에 맞춰서 양산되는 애들 보기 좋은 것 아니었던가.

 특히 좋았던 부분은 역시 영조-정조-순조로 이어지는 라인. 사도세자 부분은 정말 대단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겨레 출신, 한겨레의 비호를 받으며 이 책의 추천사까지 써 줬던 이 모씨의 기분이 어땠으려나 (...)

 비판 정신도 모든 책에 드러나 있다. 찬양으로 흐르기 쉬운 세종대왕도 "태평성대는 사대부들만의 것이었다"는 것으로 딱 끊어 버린다. 뭐 사실 더 파 보면 정말 태평성대이기는 했느냐 하는 생각도 들지만. (...) 중립 외교 버프를 받던 광해군도 까이고 개혁 군주 정조의 모습은 아예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정말 많이 퍼진 "조선 죽일놈" 식의 비판은 아니다. 흠 하나 없는 세종대왕도 없고 나으리라 욕만 먹는 수양대군도 없다. 물론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정권을 잡은 세조대왕 역시 없다. 프리메이슨 노론 없고 기득권이었던 사대부들을 모두 죽여야 된다, 없애야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때 그 때 그들의 비판할 부분과 한계를 적고 있다. 조선, 그리고 우리 나라 역사를 얘기할 때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인 지나치게 자주만 강조하는 것 역시 찾을 수 없다.

 재야사학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죽여야 된다는 식의 선동이 아니라 이것이 잘 되었고 이것이 잘 못되었다는 비판. 이게 역사를 보는 바른 자세가 아니던가

 비판할 점이 없는 것 아니다. 맨 처음에 문제가 돼서 수정까지 갔던 변중량 문제나, 솔직히 실록을 보긴 한 건가 싶은 오류들이 약간씩 보이긴 한다. 정말 공 들여 만든 것 같은데도 임진왜란은 아쉬운 점이 있고 무엇보다 실록 위주로 하기에 실록에 적히지 않을 분야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하지만 애초에 실록을 위주로 하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한계일 뿐. 개인적으로 실록이 번역된 후 나온 최고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제 18권이 나온다. 조선이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조선 말인만큼 현대 한국인의 아쉬움이 짙게 묻을 수 밖에 없을 때, 과연 그는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때 맞춰 500년을 이어 온 사대부들의 평가도 들어 있는 모양이다. 기대된다. 아직 근대를 제대로 겪지 못 한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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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권 나오기 전에 생각 정리도 할 겸 올립니다.


덧글

  • 회색인간 2011/11/21 14:32 # 답글

    흠 개인적으로 고우영 화백의 조선왕조야사(재출간명:조선왕조500년)를 재밌게 읽었는데.....박시백씨면 한겨례에서 만평 그리던 분 아닌가요? 의외네요 그쪽 계열은 무조건 조선 죽일 새끼로 빠진다고 알았는데.....
  • 눈시 2011/11/21 17:51 #

    아쉽게도 그건 못 봤네요. 고우영 화백 남긴 만화들을 본다 본다 했는데 OTL;;
    그래서 더 대단한 거죠. :) 그런 식의 진영논리? 그런 거에 휩쌓이지 않고 여러 학설과 전체적인 흐름, 그리고 실록을 직접 눈으로 본 자기의 판단을 중시하거든요.

    특히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 편은 한겨레를 본진으로 하는-_-; 이모씨에 대한 정면 반박이나 다름 없습니다. 맨 처음에 그의 주장을 친절히 소개해 준 다음에 아주 자근자근 밟거든요.

    다 보지는 않으시더라도 시간 되시고 관심 있는 왕 있으시다면 골라서 보시면 후회 않으실 겁니다. :D
  • 淸河 2011/11/23 08:22 # 삭제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원제가 조선왕조야사였군요... 어쩐지;;; '조선왕조 500년'이란 제목 치곤 처음엔 좋다가 뒤로 갈수록 음담패설에만 집중한 느낌이라 많이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앞부분은 정말 멋있었지만요. 특히 정몽주의 해석이 그당시의 제게 있어선 충격 그 자체였었습니다.
  • 회색인간 2011/11/23 14:39 #

    실지로 고우영화백께서도 민간 전승으로 내려오는 야사들을 정리한 거라 실록 기반으로 야사집을 모은 거라 할 수 있죠
  • Assessor 2011/11/21 20:23 # 답글

    검색의 폐해... 정말 공감 또 공감입니다
  • 눈시 2011/11/23 02:26 #

    세상 정말 좋아졋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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