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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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 이런저런 감상 (스포 有)

 정말 오랜만에 쓰는군요. 흐음...

 1. 이순신을 다루는 창작물을 만들 때 가장 도움될 것 같지만 의외로 가장 방해가 되는 게 난중일기의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워낙에 이런저런 거 자세히 적어놨는지라 -_-; 인간 이순신 뭐 이런 열풍이 불었지만 다 쓸데없는 소리죠. 난중일기 읽기만 해도 인간 이순신을 볼 수 있는데요. 헌데 작가들은 여기서 최대한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넣어야 되고, 자기가 원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죠. 진짜 이순신을 복원하려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기가 만들고 싶은 캐릭터로서의 이순신에 집중하겠죠. 내면 묘사를 잘 했다는 '칼의 노래'도 난중일기의 이순신과는 차이가 많이 보이는데요. 
 
 특히 명량해전에 대해선 정말 자세히 자세히 적어놨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다 도망갔는데 혼자 그냥 죽어라 열심히 싸우다보니 어느새 이겼다'라는 게 -.-; 머리 아프긴 했을 겁니다. 대장선이 후퇴도 안 하고 계속 맞서 싸웠는데 전사자는 2명 =_=; 사람 최대한 안 죽는 게 좋고 그래서 대단한 거지만 이렇게 되면 뭔가 밀린다는 위기감이 전혀 안 나죠. 덕분에 대장선은 최대한 너프, 구루지마 등은 최대한 버프를 줬구요.

 여기다가 이순신이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름값. 웬만한 위인이라면 딱히 신경 안 쓸 부분도 장군님이시기에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게 있겠죠. 문제는 그 정도도 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니 논란은 계속 일어나는 거겠구요. 어차피 장군님 이름값을 빌리는 것이니 그건 어쩔 수 없겠다 싶습니다. 

 자, 그래서 최민식의 이순신, 김한민 감독의 명량해전, 몇 가지 짚어보고 싶네요.

 2. 캐릭터들의 존재감
 영화 내적으로 가장 까이는 부분이죠. 호화캐스팅이면 뭐 하냐 배우들을 활용을 못 했는데.

 감독의 고민이 정말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감독이 고증을 위해 버린 부분이라고 보구요. 구루지마군이 좀 제대로 피해를 줬어야 영화에서도 좀 멋지게 다룰 수 있겠죠. 대장선 하나 못 꺾다가 구루지마 자신도 죽어버렸으니 -_-; 화살 맞고 바다에 떨어져서 목 잘린 것보다는 좀 많이 멋있게 해 줬잖아요. 대장선에도 백병전으로 큰 피해 주기도 했구요. 문제는 이래도 너무 허무하다는 평을 듣는다는 것...

 류승룡, 조진웅씨 같은 유명한 배우들을 일본 장수로 앉힌 것도 그게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좀 포스 있는 배우들을 앉혀놔야 무게감이라도 줄 수 있죠. 뭐 그 포스 때문에 더 허무해진 것도 있겠지만 (...) 음 그래도 조선을 먹겠다는 건 좀 오버였습니다.

 조선 장수들은 더하죠. 처음 구하러 간 안위나 좀 할 말이 있지 다른 장수들은 정말 천천히 갔으니... 얘네한테 어떤 캐릭터를 부여한다 한들 대장을 버리고 갔다가 용기 얻어서 나중에 구원하러 간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그럴거면 백성들은 뭐 그렇게 강조했답니까 -.-; 자폭선 알린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갈고리씬은 정말이지 실망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연출로도 꽤 까이던데요.

 애초에 명량해전의 키워드인 '천행'을 백성들로 돌린 것만 봐도 그게 감독의 의도였겠죠. 그걸로 고증이 크게 틀어진 것은 물론 연출로도 크게 문제가 됐으니...
 전투 전에 아들이랑 얘기했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것, 그건 장수들에게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수들이 용기를 얻어서 돌아온 부분은 안위가 화살 쏜 것 정도로 작게 다뤄졌죠. 이제 돌아왔으니 용기 얻은 모습 볼 수 있을 부분에서 백성들이 튀어나오면서 그 얘기가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로 '백성들이 천행이었다'까지.

 그나마 조선 장수들 캐릭터성 살릴 수 있는 부분 +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조선 수군을 정신차리게 해 준 부분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날려먹었죠. 덕분에 조선 쪽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수는 배설이 됐네요 (...) 칠천량의 탈출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명량 당시 징징대다 도망쳤으니 저렇게 설정해도 재밌긴 한데, 동네방네 고함지르다 화살 맞은 건 좀 오바였던 것 같아요. 

 아무튼, 불멸에서도 그노무 철쇄에 강강수월래 나오더니만... 그저 장군님 킹왕짱 그러면 안 되나요. 그게 틀린 거라면 몰라도 그게 고증에 맞는 건데.

 3. 전투
 백병전 하겠다고 판옥선보다 많이 낮은 세키부네를 비슷하게 만들어줬더군요. 거기다 아군도 좀 많이 죽고 다쳐야 되니 배 한척에서 참 많은 병사들이 타고 있구요. 죽여도 죽여도 쪽수에서 안 밀리는 수군을 본 구루지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
 백병전이나 스펙타클한 포격전이나 영화라서 어쩔 수 없다 싶습니다. 일단 장군님이 직접 칼 뽑는 순간 저도 지렸으니 ( ..) 포격전으로도 이런저런 모습 보여주기도 했고, 칼을 직접 닿지 않고 위기나 비장이나 혈전이나 이런 걸 묘사하기는 힘드니까요. 실제라면 밑에서 사다리 걸치고 올라오는 일본애들 위에서 찔러죽이는 식이었겠지만, 이걸로 긴박하게 만들기는 힘들죠. 그렇게 하고도 잘 만들 감독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못 했다고 까기는 좀. 

 애초에 이게 다 혼자 싸우고도 전사자 2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둔 것 때문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충파 부분은 반지의 제왕에서 로한군이 돌격하는 거 생각나더군요. (...);;;

 4. 장군님 파워 대단하긴 하네요. 매일마다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라니요. 휴가철 + 전국민이 다 아는 영웅이기에 가능한 거겠죠. 그대로 쭉쭉 가서 신기록 달성하고 속편들도 잘 나왔음 좋겠습니다. 정말 장군님 다룬 영화 꼭 보고 싶었고, 실망도 작진 않지만 이 정도라도 나와준 게 정말 좋네요. 흥행하니까 기분은 더 좋고 말이죠.

 1시간동안 전투라는 어마어마한 걸 보여줬는데, 다음 한산도 대첩은 어떻게 되려나요. 그대로 다루면 당하는 일본애들이 불쌍할 정도의 완벽한 승전이 될 텐데요. 일단 명량에서 굴욕당한 와키자카 좀 띄워주고, 선조 등 정치 얘기도 좀 해 주고 하겠죠? 와키자카 정도로는 악역이 부족하니 원균을 최대한 이용해 주고 ' -'

 개인적인 바람인데, 시마즈 요시히로 좀 잘 띄워줬음 좋겠습니다. 구루지마나 와키자카 같은 쩌리랑은 급이 다른 적인데 별로 안 유명하잖아요. 불멸 때도 도자기 훔치는 걸로나 나오구요. 그나마 이름값으로 조금이라도 비벼볼만한 애고 충무공 전사라는 말도 안 되는 짓까지 성공한 놈이니까 말이죠.

 이상입니다. 간만에 쓰니 좀 으색으색 하네요 '-'a

시간을 달리는 시마즈 요시히로

 발단은 엔하의 고구려 항목

 
http://mirror.enha.kr/wiki/%EA%B3%A0%EA%B5%AC%EB%A0%A4#toc

 고구려에 비하면 듣보잡이지만 백제도 백제 왕실의 후손인 오우치씨가 남아있다. 오우치씨는 백제가 망하고 일본에 간게 아니라 백제가 살아있을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들이다. 오우치씨는 물론 시마즈씨도 백제 온조의 후손이라 조선에 사신을 보내 옛 백제땅을 내놓으라는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스스로를 고구려, 백제 왕실의 후손이라 여기는 고씨, 서씨들에 비하면 이들이 훨씬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도 있지만, 어느 쪽에 정통성이 더 있을 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할 것. 소송드립[30]의 위험이 존재한다.

 ... 음?

 오우치가는 알고 있었지만 시마즈가도? -_-; 해서 검색해 봤습니다.
http://www.coo2.net/bbs/zboard.php?id=qn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도진의홍&select_arrange=subject&desc=desc&no=697
http://www.coo2.net/bbs/zboard.php?id=qna&page=16&sn1=on&divpage=2&sn=on&ss=off&sc=off&keyword=%20%20&select_arrange=subject&desc=desc&no=758

 "참고로 원문에 나오는 의홍이라는 인물은 일본 큐슈 전토를 통합한 도진의홍. 일본명으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입니다."

 ...

 ('-' ) ( '-')

 ...

 그럼 그렇지 orz

 1535년에 태어난 시마즈 요시히로가 1399년에 조선으로 가서 자기가 백제 후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_- 일본사에서 요시히로 하면 시마즈 요시히로 뿐이라는 건지 -_-;

 아나 시간 버렸네 -_-; 저건 당연히 오우치 가문 얘기구요.

 개그 수준이지만 뭐라도 하나 써야 될 것 같으니 역사밸리로 (...);


호란을 막았다면 광해군의 평가는? 전란기(선조~인조)

광해군은 호란을 막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쓰네요. 좀 써야 되는데 orz

 예전에 인조반정이 없거나 막았고, 광해군이 계속 통치했다면 호란을 막을 수 있었을까 글을 썼었죠. 제 결론은 병자호란은 진짜 들어줄 거 다 들어주고 제대로 신속해야 되는만큼 막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청이 산해관도 넘지 못 했을 때였고, 이런 상황에서 중립을 완전히 포기하고 청 편에 서라는 거였으니까요.

 이 IF에서 더 나아가서 광해군이 정말 청 말을 다 잘 들어줬고 덕분에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 그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요?

 여기서 크게 봐야 될 건 전쟁이 없었다는 가정이니, "광해군이 그렇게 안 했으면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정이 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현대에 유행하는 자주적인 면으로 보자면요.

 일단 청이 만족할 정도의 물자를 대야 합니다. 조공의 형식이든 무역의 형식이든요. 중국과 싸우는 이상 청이 기댈 곳은 조선밖에 없었고, 청의 경제가 최악으로 갈수록 조선에 더 기댔을 겁니다. 일단 여기서 최대한 다툼 없이 최대한 물자를 대 줘야 되죠. 신속 같은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알아서 빨리 길수록 전쟁 위험은 더 줄어들 겁니다. 중립이 아닌 확실히 청 편을 드는 것 말이죠. 광해군의 태도에 따른 홍타이지의 태도 변화라는 거대한 변수가 있긴 합니다. 이건 병자호란 즈음 청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을 얼마나 느꼈는가에 따라 달리겠죠. 제 결론은 달라질 건 없다는 거구요.

 아무리 청이 강하다 해도 산해관도 넘지 못 하는 상황에서 빠른 GG와 엄청난 물자를 대주는 상황, 전쟁 무섭다고 일찌감치 알아서 긴 거냐는 말이 나올 상황이죠. 여기서 광해군의 다른 정책은 그대로 가서 인경궁까지 완공했다면? 궁궐병으로 내정 망가뜨린 상태에서 청에도 잔뜩 퍼 주는 상황이 되는 거죠.

 뭐 다른 건 역사대로 가서 청이 명을 접수했으니 대세를 잘 알고 미리 굽혀서 나라를 지켰다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좋게 볼 경우 삼국통일할 때의 신라와 원명교체기의 조선과 비슷한 평가를 받겠죠. 반대로 그 둘이 받는 비판(자주적이지 못 했다)는 것 역시 받을 수 있는 것이죠.

 글쎄요. 중국이 그렇게 혼란상황이니 이  때야말로 진정으로 독립할 기회였는데 놓쳤다는 말도 나오지 않을까요?

 IF에 IF를 거듭했으니 좀 그렇긴 하지만 -_-a 간만에 썼으니 역밸로~ 후금은 걍 청으로 썼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무오사화 - 임금이 사초를 보다

"김일손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극돈이 일찍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싣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 먹은 일을 사초에 썼더니 이극돈이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그 청을 거절하자 김일손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국조기사)

"후에 사국(史局)(성종실록을 편수하기 위한 것이다)이 열리자 이극돈이 당상이 되어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유자광전)

무오사화의 시작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훈구파 이극돈과 사림파 김일손의 사적인 감정으로 시작됐다는 것이죠.

그런 이극돈에게 토스를 받아 사화를 주도한 유자광, 그에 대한 건 너무 기니 직접 얘기하도록 하죠.

그는 부윤 유규의 서자로 힘 세고 건강했다 (...) 합니다. 어릴 때는 바둑, 장기나 활쏘기 등 놀기만 하고 밤에 여자를 잡아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하고 있죠. 아버지 유규는 그런 그를 자식 취급하지 않았다 하구요. 이후 갑사가 돼 궁을 호위하는 병사로 있다가 이시애의 난 때 세조에게 아주 강경한 상소를 올렸고, 세조는 그를 아껴 폭풍 진급을 하게 됩니다. 서자임에도 말이죠.

그가 벌인 대표적인 일이 바로 남이의 옥사입니다. 이 때부터 그는 모함의 아이콘으로 한명회를 모함하기도 했고 이 때에 이르러 이극돈과 붙어 일을 벌였다는 겁니다.

... 이런 유자광전을 지은 게 남곤이라는 게 살짝 유머죠.

+) 남곤은 중종 때의 권신입니다. 그 유명한 조광조를 모함해 죽였다고 평가받는 이죠. 훈구파로 평가되지만 정작 그는 사림파의 시작이라 할 김종직의 제자였습니다. -_-a 뭐 조광조가 죽은 것도 내막을 보면 좀 다릅니다만 (...)

서자 출신이지만 능력은 참 있었던 거 같습니다. 무오사화에서 그 어려운 조의제문을 해석한 것도 그였으니까요. 그가 무오사화에 참여한 이유 역시 김종직에 대한 원한이었습니다. 그는 함양에서 놀다가 시를 지어 벽에 달아뒀는데 김종직이 군수로 왔다가 '유자광이 뭐하는 놈이길래 이라노? ㅡㅡ' 하면서 그걸 불태워 버립니다. 서자 출신이라 무시했다는 거죠. 그럼에도 유자광은 그를 (나이도 어린데) 잘 대우하면서 복수의 때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사화를 시작한 이극돈은 사화의 빌미를 준 김일손에게, 사화를 주도한 유자광은 사화의 배경이 된 김종직에게 원한이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사화, 무오사화에 대한 설명이죠.

그럼 실록에선 어떻게 나오는지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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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의 시작이 갑작스럽긴 했습니다. 연산 4년(1498) 7월 11일 이극돈에게 명령한 것이 시작이죠.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내로 들여오라."

사초는 사관들이 남긴 기록들로 이를 토대로 실록이 만들어집니다. 이 내용이 연산군의 귀에 들어간 것이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건 왕이 보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왕 앞에서 보고 들은 걸 기록하는 사관들이 왕이 이걸 볼 거라 생각하면 그대로 적을 수 없을테니까요. 물론 완성된 실록을 왕이 아예 못 보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 상고를 목적으로 그 부분만 신하들이 찾아서 보고하는 식이었죠. 어쨌든 이 때는 달라도 참 달랐습니다.

이극돈은 사초는 임금이 보면 안 된다고 했지만 연산은 모두 들고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이극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일이 만일 종묘 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고열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에도 합당합니다."

이것이 무오사화의 시작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좀 다르죠. 무오사화의 시작이라는 이극돈이 '우리끼리 알아서 처리했다'면서 한 발 물러났으니까요. 그럼에도 연산의 귀에 들어갑니다. 이 달 1일에 그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파평 부원군 윤필상, 선성 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 무령군 유자광이 차비문에 나아가서 비사(秘事)를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으로 출납을 관장하게 하니 사관도 참예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검열 이사공이 참예하기를 청하니, 수근은 말하기를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관도 참석시키지 않은 나름 초유의 사태를 벌인 거죠. 여기서 비밀 얘기를 나눈 후 금부도사가 경상도에 파견됩니다. 누굴 잡으러 갔을지는 뻔하죠. 김일손은 그 때 모친상 + 병에 걸려서 청도에 있었습니다. 11일에 말이 나와서 12일에 김일손이 바로 잡혀오는데 지금이야 무궁화호 타도 가능했겠지만 그 때는 아니었죠. 미리 계획 후 잡아오면서 이 사실을 공표했을 겁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이루어졌는가는 후에 이극돈이 올린 상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실록의 사관이 낸 결론과 야사에서의 모습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림 측은 이극돈이 역시 실록 편찬을 맡은 어세겸에게 갔다가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 했고 이어 유자광에게 갔고 연산군에게 보고된 걸로 돼 있습니다.

반면 이극돈의 상소에서는 한치형, 신종호, 노사신 등 대신들과 여러 차례 의논했고 대신들 역시 이극돈의 말을 듣기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어쨌든 연산군에게 알리긴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겁니다. 이후 대신들이 이에 대해 자기의 입장을 표명했는데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그 내용을 디벼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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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덕종은 성종의 아버지로 성종 때 왕으로 추숭됐습니다. 그의 후궁을 세조가 탐냈다는 것이죠.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

단종의 시체를 버려놨다는 부분입니다.

그 외에 볼 수 있는 부분은 황보숭과 김종서, 사육신 등이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고 한 부분,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의 관을 바다에 버렸다고 한 부분입니다.

하나같이 세조의 집권의 부당함을 적어놓은 것이죠.

연산군은 그들을 국문하며 들은 바를 묻습니다. 계속되는 고문과 사관은 직필을 해야 하지 헛소문을 쓰면 안 된다는 어찌보면 맞는 요구에 김일손의 입에서 다른 이들이 나왔고, 줄줄이 끌려옵니다. 어디의 누구에게 들었다, 내 생각이다는 식으로 진술이 나왔죠.

이런 가운데서 폭탄이 터집니다.

http://mirror.enha.kr/wiki/%EC%A1%B0%EC%9D%98%EC%A0%9C%EB%AC%B8

이게 조의제문입니다.

"(단종의 시체가 버려졌다고)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내용, 하지만 김일손은 그게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를 말합니다. 유자광은 그 내용 하나하나를 풀이하며 연산군에게 해설해 줬죠. 그 다음이 어찌될지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관 한 명이 단종과 사육신 등을 그리며 세조를 비판하기 위해 올린 기록들, 연산군에게 이것은 그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승 김종직의 글까지 덧붙여버립니다. 실록에 올라갈 글이 아니었음에도 말이죠.

이렇게 사건은 김일손 자신을 넘어 김종직과 그의 주변인들에게로 번져버립니다.

조정은 얼어붙습니다. 임금이 사초를 본다는, 어긋나는 행동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명분, 세조를 부정했다는 명분이 연산의 손에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대신들은 물론이고 기세등등하던 대간들도 여기에 아무런 말을 못 합니다. 그저 김종직과 관련인들을 처벌해야 된다는 목소리만 높아졌죠.

이렇게 최초의 사화 무오사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의 사화 외에도 사초를 가지고 일어난 일이기에 史禍라고도 불리죠.

그 과정은 참 흥미로운 부분도 많고, 의외라 할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이후 연산의 폭주와 연관지어보면 그렇죠.


그들의 죽음 - 세종대왕 조선 전기(태조~명종)

죽음에 관하여를 뒤늦게 정주행했는데 -_-a 좀 울었네요.

역사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죽어갔는지 좀 들춰보려구요. 조선시대 왕들 다 해보려고 했는데, 일단 대왕님만 해 보도록 하죠. 간만에 대왕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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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유명한 게 많은 대왕님입니다만, 최근에 좀 뜨고 있는 게 바로 고기사랑이죠.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여삐 보지 않겠는가?"

세종 2년, 정종이 죽었을 때 태종이 한 말입니다.

"태종께서 유교(遺敎)하시기를, ‘주상의 성질은 소선(고기 없이 소식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하시어, 태종의 유교가 귀에 쟁쟁하온데, 그 유교를 따르지 아니하심을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하죠 (...)

뭐 이게 그냥 '쟤는 고기 없으면 못 사니까'라고 챙겨준 것만은 아닐 겁니다. 세종은 상중에 소식하는 것을 지켰고, 그게 유교에서 옳은 자세긴 하지만 임금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죠. 그러다 쓰러지면 나라가 어찌 될 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서 초상날 때마다 세종은 고기 안 먹겠다, 신하들은 태종 유언을 지켜서 고기 드셔요 하는 싸움이 곧잘 일어났습니다.

아무튼... 고기 덕후라는 건 태종이 제대로 인증해 준 거죠.

고기 없으면 밥을 안 먹고 언제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상황... 비만이 올 수밖에요.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를 강습하려 한다."

태종은 이러면서 세종과 함께 사냥을 갔는데, 이 때가 세종 즉위년(1418), 그의 나이 22살 때입니다. 이미 이 때부터 비만이었다는 거죠. 뭐 태종이 놀러가려고 꼼수 쓴 걸로 보기도 합니다만 (...)

그리고 비만으로 오는 병... 그의 증세를 보면 현대에도 유행하는 어떤 병과 참 닮았습니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정(온천)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대간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말하고, 대신도 그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로 인하여 온정에서 목욕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에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消渴症)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 (세종 21년 6월 21일)

"소갈병을 앓아서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 동이만 되었겠는가."

소갈, 동의보감에서 이 병을 어떻게 적었는지 봅시다.

소갈, 소중, 소신 병은 오장 삼초 허열일세 / 방광 홀로 얼음 같아 기화 작용 못한다네
물만 찾아 쉴 새 없고 오줌 또한 멎지 않네 / 뼈는 차고 겉은 타며 심장 폐장 터지는 듯
그 원인을 찾아보니 한두 가지 아니로세 / 술을 즐겨 지내먹고 고기 굽고 볶았으며
술 취한 후 방사하고 노력 또한 지나쳤네 / 물 마시고 밥 먹는 것 날을 따라 늘어나니

살은 점점 빠져가고 정액, 골수 마른다네 / 꿀과 같은 단 오줌은 기름같이 미끄럽고
입은 쓰며 목은 타며 혓바닥은 핏빛일세 / 삼소 증상 이러하면 위험하기 짝 없는데
신선의 처방이 진실된 묘방이라네.

여기서 볼 수 있는 건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도 많이 보며 밥 먹는 것도 느는데 살은 빠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변이 달다고 합니다.

네.

당뇨병과 소름끼치도록 닮았죠 -_-; 위를 삼다(다음 다뇨 다식) 현상이라 한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다른 모습도 있다 하는데, 대체적으로 역사 속의 소갈증을 당뇨병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당뇨병의 증세와 비교해본다면 이 부분 역시 의미심장하죠.

"30살 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나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 ’고 하였다. 나의 쇠함과 병이 전에 비하여 날마다 더욱 심하니 경은 그런 줄을 알라" (세종 13년 8월 18일)

그의 말대로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3이었습니다. 배는 계속 고프고 먹는 건 늘어나는데 살은 되려 빠지는 병, 이게 당뇨병이죠.

이쯤되면 그가 눈이 멀어간 것 역시 의심됩니다. 당뇨병의 합병증에는 이것 역시 포함되거든요.

다만 이건 다른 병이 원인으로 보기도 하더군요. 그는 소갈과 함께 풍질에 걸렸다고 호소하는데, 이게 강직성 척수염과 닮았다고 합니다. 이 역시 눈병을 동반한다고 하구요. 이건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위에 옮긴 것도 사실 풍질 때문에 살 빠졌다고 하는 겁니다.

"한낮이 되어 잠시 이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이 되었다."

그 외에 임질에 걸렸는데, 이걸 성병으로 볼 순 없다고 하네요. 성병뿐만 아니라 생식기에 걸리는 병을 통칭한다구요. 뭐 이것 때문에 세종은 성병에 걸렸다는 떡밥이 만연합니다. 자세히는 모르니 더 이상은 노코멘트. 그런 상황에서도 많은 자식을 낳았다는 걸 보면 -_-; 대단하기도 하네요. 당뇨에도 성기능 장애가 포함된다고 들었는데 아닌 건지...

어느 쪽으로 보든간에 참 종합병동입니다. 위로는 눈부터 아래로는 거시기까지...

이렇게 그는 최소 30대 초반부터 죽을 때까지 온갖 병에 시달렸습니다. 때문에 재위 20년이 넘으면서 슬슬 은퇴하려고 했죠. 위에 소갈이 나온 대화도 세자에게 슬슬 넘겨주려는 과정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니까 나온 말입니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꾸준히 반대했고, 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큰 일은 내가 직접 다스리겠으나, 그 나머지의 서무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하니, 이것이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히 하는 뜻이다. 경 등은 어찌하여 내 병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억지로 말하는가?"

이 때가 세종 27년, 참 징하게 반대했나 봅니다. 그렇게 나라를 생각했던 왕이 나라는 둘째치고 자기 몸 하나 지키기 힘들다고 버럭한 것이죠. 결국 이 때부터 문종이 차츰 정사를 보게 되죠. 세종은 수양 등 -_-; 왕자들의 집을 옮겨다니며 신하들과 거리를 둡니다. 주로 수양과 안평대군이 세종의 명을 전했죠.

문제는... 그렇다고 그가 쉰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위의 연도를 다시 봅시다. 그 이전부터도 그는 계속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세자에게 최대한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세종 25년에 창제됩니다. -_-;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용비어천가부터 해서 훈민정음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고, 정간보를 만드는 등 음악 쪽으로도 발을 넓히고, 고려사를 계속 검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다시 하라고 하질 않나... 이쯤되면 왕 일 많이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겠다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정사를 아예 무시한 것도 아니었죠.

병을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휴식, 그게 그에겐 없었던 거죠. 방향만 조금 바뀌었을 뿐. 당뇨병에는 피곤과 무기력증이 동반된다는데 그런 게 없었던 건지 이겨낸 건지...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병 걸리면 쉬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당장 쉬고 싶다고 세자에게 일 맡긴 건데 말이죠.

이러니 병이 나을 리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문종도 심심하면 아파서 걱정했을테니 마음의 휴식도 있었을 리 없죠. 그는 결국 왕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죽기 직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의 몸이 완전하게 평복되지 못하여서, 승정원에서 사건을 아뢰지 않았으므로,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건을 아뢰매,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 처리하기를 물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는 문종도 종기 때문에 몸조리하던 중이었고, 그 역시 몸이 이미 한계였습니다. 그럼에도 일어나서 쌓인 일들을 모두 처리한 것이죠. 죽기 3일 전의 일이었습니다.

딱히 남긴 유언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 이 모습을 보면 유언이 필요나 있을까 싶어요. 온갖 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일을 하다 간, 정말 그다운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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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좀 큰 문제가 나왔는데... 왕자들 집을 옮겨다니며 왕자들에게 의지하다보니 그들의 세력이 커져버린 거죠. 특히 둘째놈이 -_-; 하긴 문종이 바로 그의 뒤를 따를 줄 알았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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