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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간단 잡상

 대체

 이글루스엔 무슨 일이 있어 왔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_=;;;

 난 그냥 조용히 살아야지 ( - -)

대몽항쟁 - 16. 3대 세습은 피와 함께 대몽항쟁

1. 칸의 죽음
몽고군이 다시 들어와 깽판을 치면서 북부지방에서는 피난 행렬이 계속됐습니다. 요행히 피한 이들도 있었고, 산성에 숨어 있다가 진격로 상에 있었다는 이유로 철저히 파괴된 곳도 있었죠. 이는 몽고군이 다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아모간은 어디까지나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었고, 고려 조정에서도 이를 알았든 몰랐든 이들이 다시 올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죠.

이런 가운데서 돋보였던 것이 바로 뒤에까지 중간 보직으로 -_-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김방경입니다. 그는 위도라는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에 백성들을 모은 후 둑을 세웁니다. 이걸로 강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아 농사를 지었고, 섬에 우물이 없어 육지로 물을 구하러 갔던 백성들이 잡히는 일이 생기자 비를 저장하는 못을 만들죠. 처음에는 피난 와서 이런 데 투입돼 괴로워 했던 이들은 가을에 풍년이 들어서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화려한 무공은 아니었지만, 참 볼 만 했던 첫 출현이었죠.

그 해 10월, 아모간은 다시 병력을 황해도 일대에 투사합니다. 압록강도 필요 없었습니다. 청천강 북쪽이 전진기지가 됐으니까요. 그 수는 약 40여기, 수달을 잡는다는 핑계를 댔지만 정찰 혹은 무력 시위라는 건 다들 알 수 있었습니다. 최이(최우)는 차례를 정해 개경에 보냈던 양반들을 다시 강화도로 불러들입니다.

몽고는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괜히 자기들 힘 뺄 필요 없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만 어느 정도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 행보는 거기서 끊겨 버립니다. 구유크 칸이 죽어 버렸거든요.



칭기즈 칸으로부터 시작된 몽고 제국의 칸들 중에 유독 평가가 나빴던 구유크 칸, 재위기간도 그만큼 짧아서 인지도도 바닥이죠. 이후 칭기즈 칸의 셋쩨 아들 오고타이 칸 계열은 이후 몰락했고,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 계열의 약진이 시작됩니다. 바투도 구유크 칸에 맞서 몽케를 밀었고, 그가 자객을 보내 구유크 칸을 죽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구유크 칸이 살아 있었다면 아모간의 작전은 계속됐을 겁니다. 그 신중함 만큼이나 어떤 성과를 올렸을 수도 있죠. 하지만 해군의 뒷받침이 없는 이상 아무리 잘 한대봐야 결정적인 성과를 세우는 건 무리였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나 마냥 고민만 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죠. 신중함이 아니라 무능함일 수도 있구요.

그 때문인지 구유크 칸이 죽어서 후퇴했다는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원사에서는 이를 "이기지 못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건 이전은 물론 앞으로도 없었던 기록이죠. 물론 그렇다고 졌다고 하진 않았지만요.

아무튼, 고려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아주 약간의 시간을 다시 벌게 됩니다.

2. 최우의 죽음
그 동안에도 사신은 계속 오갔습니다. 고종의 입조를 요구하는 것이었죠. 고려에서는 이번에도 철수하면 입조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모간도 본국의 사정 때문에 믿을 수 없으면서도 이걸로 합의 보고 갔구요.

하지만 구유크 칸이 죽은 걸 알게 된 최이(최우)는 다시 강화를 무시하게 됩니다. 대신 그는 3대 세습을 확실히 하는 데에만 매달렸죠. 자기 몸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최이가 눈여겨보던 이는 환속시킨 최항과 외손자로 역시 죄를 지어 중이 됐다가 다시 환속시킨 김미였습니다. 몽고군이 돌아갔음을 알게 된 최항은 김미를 죽이려 했죠. 이에 김미는 어마어마한 백을 소환하니, 자기 백부였던 귀주성의 영웅 김경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우직한 무자이었을 뿐이었던 것인지, 반대로 정치적인 감각도 뛰어났던 것인지 김경손은 도움을 거부하고 오히려 최이에게 이를 고발합니다. 이에 최이는 김미를 지지했던 장수들을 고문한 후 강에 던져 죽이고, 나머지는 귀양보내거나 내쫓아 버립니다. 그 수가 40여 명이었다고 하죠. 김미 자신도 고란도로 귀양 갑니다.

이렇게 최이의 후계는 최항 독주 체제가 되었죠. 아직 몽고에서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칸의 부재가 몽고에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 최이와 최항의 권력 승계는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됐죠. 가을에 동주(강원도 철원)에 여진병이 들어오자 해당 방면의 병력들이 격퇴한 일도 있습니다.

+) 몽고와 싸우다 보니 여진은 이제 껌으로 보인 듯 -_-;

그 해 11월, 최이는 죽습니다. 몽고의 1차부터 4차까지의 침공을 모두 (겉으로는) 막아 냈던 그, 구국의 영웅이라 칭송받아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만 그 공은 절대로 그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강화도로 들어간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하더라도 그 전후의 모습은 그 선조조차도 명군으로 보이게 할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그나마 그가 있어 고려가 돌아갔습니다. 그의 후계는 그보다도 정통성과 경험이 없었죠. 선조에 이어 인조가 명군으로 보일 상황이 닥쳐 옵니다.

최이가 죽자 도방의 모든 관리와 장수, 병력들은 최항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동서북면 병마사를 모두 겸하며 나라의 모든 권리를 휘어잡았죠.

최이가 죽은 지 2일 후, 최항은 상복을 벗습니다. 그가 달려간 곳은 최이의 애첩들이 있던 곳, 그의 치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3. 대 세습은 피와 함께

이렇게 정권을 이어 받은 최항은 곧바로 숙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이 없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가 첫 타겟으로 삼은 이는 김경손과 민희였습니다.

김경손은 단 열두기로 몽고군을 무찔렀고, 반란군조차도 그를 존경했으며, 최우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 했던 살아 있는 전설이었습니다. 한편 민희는 전공은 그리 크지 않지만 화친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맡았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북계에 파견돼서 복구를 담당했던 이였죠. 이유야 단 하나였죠. 워낙에 잘났으니까요. 이 때 김경손은 백령도로 귀양 갔고, 민희는 이후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외에 자기 자리를 위협할 만한 이들은 모두 숙청했는데 최우의 양자 최환부터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 등 3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고종은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오히려 그를 정승의 반열에 올리며 권리만 굳건히 해 줬죠.

그 다음에는 좀 볼만한 일들을 벌입니다. 여러 세금을 면제하고, 자기 쌀을 베풀어 줬죠. 나름대로 인심을 수습하려 한 것입니다. 최충헌도, 최우도 했던 방법이었죠. 그리고 그들이 그랬듯, 본색도 곧바로 드러납니다.

"최항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거느리고 장봉택으로부터 말을 달려 견자산의 진양부로 가는데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편의 작은 지게문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사람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최충헌과 최우에게는 그래도 사람을 부리는 재주는 있었습니다. 최충헌은 문신들과도 손을 잡으며 상황을 그나마 정상으로 되돌렸고, 최우도 반란은 다 때려잡으면서 큰 숙청은 하지 않았죠. 하지만 최항에게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최충헌은 자기 힘으로 그 자리에 올랐고, 최우는 최충헌이 죽기 전에 이미 요직에 올라와 있었죠. 반면 최항은 뜬금 없이 나타났고, 능력도 확실하지 않았으며, 지지층은 얇디 얇았습니다. 그리고 대를 이어갈수록 정통성은 줄어만 갔죠. 이는 아무리 최충헌, 최항 대의 측근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제거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낙하산의 한계였죠.

이런 점에서 북에 애비 잃은 놈이랑 참 닮았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뭔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1250년 3월, 그는 전 추밀원 부사 주숙을 물에 던져 죽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욕을 가득 차 있었지만 적어도 최우의 심복임은 분명했죠. 그의 잘못은 단 하나, 최우에 가장 가까운 축에 있었으면서도 남들이 다 최항 편을 들자 그제야 자기에게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자기의 계모 대씨를 내쫓고 재산을 몰수합니다. 자기 대신 김미의 편을 들었따는 죄였죠. 이어 대씨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장군 오승적을 바다에 던집니다.

+) 최씨는 참 물에 빠뜨려 죽이길 좋아합니다

이어 최우에게 자기를 참소했던 박훤도 바다에 던집니다. 애초에 그 죄로 귀양가긴 했지만 최우가 참 아끼던 심복으로 죽기 전에 국사를 의논하기 위해 불렀는데 오기도 전에 최우가 죽어버린 상황이었죠. 최항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죽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벌어진 최항의 새장가는 참 볼 만 했습니다.

"왕이 견룡군(왕 친위대)과 중금도지순검 백갑내시다방에 명하여 호위하여 보내게 하고, 또 어좌견여를 주었다. 등촉과 의물의 성대함이 견줄 데가 없었으며, 또 황금으로 만든 경렴과 장구를 특별히 하사하고, 여러 왕씨와 재ㆍ추 는 금과 비단으로 축하하였다."

급기야 강화도 내에서는 "사람 50명을 천구성에 재물로 바쳐라"는 유언비어가 나돕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공포에 떨었고, 이 틈을 타 강간이나 도둑질을 저지른 자가 많았다고 하죠. 뭐 이걸 유언비어라고 봐야 될까요 -_-;

그 해 말에는 서북면 지병마사 송국첨이 죽습니다. 박훤과 마찬가지로 최항이 싫어했던 이였습니다만,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죽어 지냈고 최항도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죠. 송국첨은 자기가 쓰이지 않는 것을 분해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한편 1차 침공 당시 자주를 지킨 영웅 최춘명도 이 때 죽습니다.

뭔가 너무 많이 죽죠? 다 최항이 죽인 건 아니었습니다만.

이게 끝이냐면 또 아닙니다. 이번엔 또 해가 흘러 1251년이었죠. 이 때 어이 없는 사실이 알려지니, 바다에 던진 오승적이 마침 썰물이라서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밤을 틈타 도망친 그는 금강산으로 가서 대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하필 대씨의 종이 밀양에서 그 사실을 누설한 것이었죠. 최항은 급히 그를 다시 강에 던지고, 대씨를 독약으로 죽이는 한편 그 주변인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립니다. 죽이거나 귀양 보낸 것이 70여 명이나 되었고, 귀양 간 사람들 중에서도 물에 던진 게 절반이 넘었다고 하죠. 그런데...

그 중에 포함된 사람이 김경손이었습니다.

"경손은 평장사 태서의 아들인데, 어머니 꿈에 오색 구름 사이에서 푸른색 옷을 입은 한 동자를 여러 사람이 옹위하여 품안으로 떨어뜨려 보냈다. 드디어 태기가 있어 낳았기 때문에 처음 이름을 운래(雲來)라 하였다. 머리 위에는 용의 발톱같이 생긴 뼈가 있었고, 성이 나면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일어섰다. 성품이 씩씩하고 중후하고 화평하며 여유가 있었고, 지혜와 용맹이 출중하였다. 귀주를 지키고 나주를 평정하여 그 공이 비교할 데가 없었는데, 간적(姦賊)에게 해를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아깝게 여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이순신은 노량에서 장수된 자로 죽고 불멸의 성웅이 됐습니다.


반면 디미트리 페트렌코는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을 꽂고 영웅이 됐지만 같은 러시아인에게 비참하게 죽었죠.

김경손 역시 귀주성에서 전사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최우의 최측근으로 딱히 무공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1차 침공 당시 서북에 있던 것도 그냥 하필 그 타이밍에 거기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최항이 정적으로 보기엔 충분한 인물이긴 하지만, 최항이 후계자가 되는데 꽤 큰 공을 세운 것 역시 김경손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면 충성, 적을 막는 능력이면 능력, 처세술이면 처세술, 이 정도면 이순신 장군조차 갖지 못 한 장수로서의 완전체죠. 김경징보다 더 한 백이 있으면서 공은 이순신 수준으로 올렸고, 처세는 원균 정도로 한 겁니다.

그랬기에 최항이 무조건 죽여야 될 대상이긴 했겠죠.

참... 짜증납니다.

중간에 개드립은 신경 쓰지 마세요 (...)

역밸 콘서트 후기 + 대몽항쟁 - 15. 재침 대몽항쟁

 다른 분들이 자세히 다뤄주셨으니 간단히 제 후기를 말하자면...

 1. 정말 이런 저런 얘기, 평소 때 오프라인으로 실컷 얘기하고 듣고 싶었던 얘기들이 자유로이 오가는 게 참 즐거웠습니다. 일반인들끼리 얘기할 때는 분위기 망치는 지름길이 되는 얘기였으니까요.

 2. 경군님의 요시치카 얘기는 참 -_-; 타이라노 키요모리부터밖에 모르는 저로서는 그 이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죠. 겐지와 헤이시의 대립, 그 속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등장해야 했던 이유는 고찰해 봐야 될 문제인 거니까요.

 3. 진성당거사님의 얘기는 그저 재밌었다고밖에는 (...) 저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인 얘기였는데 예전에 많이 하셨다고 하더군요.

 4. shaw님의 로마사에서 느낀 점은 하나였쬬. 저 역시 공화정은 로마인 이야기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들구나 하는 거요. 공화정 중기에 대한 얘기를 넘어서 공화정 자체에 대한 고찰과 빼뽀네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까지... 주식회사에 비유하신 것은 뭔가 살짝 충격이었습니다. '-')

 5. 뒷풀이야 뭐 ~_~;;; 누친님 집에 잘 들어간 것만으로도 다행 (...) 크핫군님 집에 갈까 말까 하다가 뒷풀이 가 버려서 죄송해요 ( ㅠㅠ);;

 6. 아무튼... 역밸 모임에 처음 참가했는데... 정말 재밌었습니다. 다음에 또 가서 여러 얘기 나누고 싶네요.

 그럼 본편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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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짧은 휴전
"북계의 시내와 강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 두께가 4, 5척이나 되는데, 갑자기 갈라져 흘러 내려가니, 부로들이 오랑캐 군사가 경계 안에 들어올 징조라 하였다" - 1245년

최이(최우)의 막장 행각은 계속됐습니다. 자기 집을 꾸미기 위해 육지에서 잣나무와 소나무를 계속 운반하고, 하다못해 얼음까지도 운반하게 했죠 -_-; 남의 참소만 듣고, 혹은 자기에게 맘에 들지 않으면 강이나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거리도 계속됐구요. 이 중 김경손도 모함을 받긴 했지만 그에게까지 벌을 줄 순 없어서 다행히 넘어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육지를 복구할 생각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각 도에 권농별감을 보냈는데, 말 그대로 농사를 권장하는 직책이었죠. 하지만 실상은 세금을 더 원활하게 거두기 위한 것이었고 기존의 방호별감이랑 다를 게 없어서 폐지됩니다.

그 아들 만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훤(박문수)가 얘기하기도 하고, 송국첨도 그들이 하는 사채를 막아보기도 했고, 김지대의 경우 아예 만전의 수하를 강물에 던져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건 만전의 이 한방으로 해결됩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이같이 압박을 당하니, 만약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 형제는 죽을 곳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꼴에 아비라서 그런 건지, 이런 것을 통해 뭔가 (삥 뜯는?) 능력을 본 건지 최이는 그를 환속시켜 자기 후계로 삼습니다. 그는 속세에 돌아오자마자 상장군에 오르니 바로 최항입니다.

3차 침공이 끝나고 몽고군이 물러간 지 어언 8년, 결국 그 동안 최이가 한 것이라고는 자기 집 꾸미기랑 자기 후계 만든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동안 육지의 상황은 처참하게 돌아가고 있었죠. 5년 동안의 피해는 그리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금은 내야 했고, 최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에 계속 동원돼야 했죠. 이런 상황에서 1246년에는 이런 일까지 벌어집니다.

"독충이 비처럼 떨어졌다. 그 벌레는 몸이 가는 그물에 싸여 있는데 쪼개면 흰 털을 베는 것 같고, 음식에 딸려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피부를 물면 사람이 곧 죽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식인충이라고 불렀다. 약을 써도 죽지 않았으나 파즙을 바르면 곧 죽었다"

대체 어떤 놈이었는지 몰라도 타이밍은 참 잘 잡은 것 같습니다. -_-

그렇게 1247년이 밝았습니다. 이 때 몽고에 항복한 동진에서 50명이 고려에 귀순해 오기도 했지만 그저 (이제는 괴뢰국이 된) 동진과의 대립을 낳을 뿐이었죠. 최이는 이 해 만전을 환속시킵니다. 그리고, 전 해에 칸이 된 구유크 칸은 마침내 고려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2. 재침
폐허가 된 서북 지방에는 심심하면 몽고군이 쳐들어와 수달을 잡아가는 등 약탈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죠. 이 해에도 400여 명의 병력이 들어왔죠.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황해도 수안까지 둘러보며 정찰을 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3차 침공은 몽고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돌아간 케이스입니다. 아무리 좁아도 거친 편인 바다를 건널 순 없었고, 아무리 육지에서 깽판을 쳐도 고려왕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느꼈죠. 그렇다고 고려 전체를 불태우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유목민, 기마병이 아무리 기동력이 우세해도 대군이 움직이려면 보급이 필요했습니다. 몽고군은 대규모의 말과 양 들을 이끌고 다니며 보급했죠. 하지만 이 가축들을 충분히 먹일 수 없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보면 금나라는 쌀을 먹고 전쟁 때마다 그 쌀을 운반해야 되니 초원으로 올라올 수 없다는 내용이 (약간 비웃는 듯이, 혹은 몽골의 유리함을 자랑하는 듯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죠. 초원이 아닌 곳에서는 전투력은 둘째 치고 천하의 몽고군도 보급 능력이 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군을 몰고 들어오기도 힘든 상황, 대군을 몰아치더라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눈 앞에 보이는 성들을 다 깨뜨리지 않는 이상 고려 전체를 먹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고려에 온 신경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서쪽의 바투 등과는 결별하다시피 했고, 남송과의 전면전도 시작돼 버렸으니까요.

그렇다고 항복한다 해놓고 제대로 공물도 바치지 않고 입조도 안 하는 고려를 그냥 둘 수도 없었습니다. 짧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 대장을 맡은 자는 아무간(야무칸), 그는 구유크 칸의 명령을 기다리며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자 실행에 옮기죠.

3. 왕은 나오라
"우리 나라는 몽고와 화의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경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도피하여 숨어 있던 자까지도 모두 쫓기고 노략질을 당하여 화를 면한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하였다"

그는 별 목표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게릴라전에 휘말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진격한 것도 아니었죠. 압록강에서 서해도(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숨어 있는 성을 하나하나 공격하며 남아 있는 고려인들을 처리한 것입니다. 결국 몇 년 동안의 평화로 조금이나마 살 만 했던 사람들은 다시 섬이나 다른 지방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 그렇게 몇 차례 계속 밟히면서도 사람이 계속 살았다니 참......

이 과정에서 이후 궂은 일을 도맡아 한 김방경이 등장합니다만 다음 편으로 미루겠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진격한 아모간은 마침내 황해도 연안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넓은 바다였죠.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몽고군이 거기까지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조정에는 큰 충격이었죠.

조정에서는 바로 사신을 보내 몽고군을 호궤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죠. 철수하면 공물을 성실히 납부하고 입조하겠다는 것, 아모간은 고종이 직접 나오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또 대립하다가 이번엔 강화도 맞은편 갑곶진으로 장소를 바꿉니다. 고려에서는 다시 신안공 왕전이라는 카드를 내밉나다만, 결국 결렬됩니다.

고려가 계속 버티는 걸 본 아모간은 별 미련 없이 후퇴합니다. 어차피 해전 준비가 안 돼 있었으니 더 이상 방법이 없었고, 더 밀고 나가봤자 3차 침공 때와 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었죠. 그가 이끈 병력도 그리 많진 않았던 모양이고, 고려 조정을 직접 타겟으로 삼아서 병력을 분산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피해가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로 인해 청천강 북쪽은 확실히 몽고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계 지방 전체가 몽고의 전진기지화 됐죠. 굳이 압록강을 건널 필요가 없었고, 몇 차 몇 차를 나눌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년 크고 작은 규모가 들어왔다 나갔다 합니다. 고려가 완전히 무릎 끓을 때까지 말이죠.

아모간은 우선 청천강 북쪽으로 철수합니다. 하지만 흔히 4차 침공이라 정의하는 이 전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에도 그는 쳐들어 왔고, 다행히 이번에는 섬으로 도망쳐서 피해도 그리 크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끝낸 것은 고려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데서 왔죠.

한편 아모간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최이는 아들 최항을 추밀원지주사로 삼습니다.

최이가 죽을 날도 그리 멀지 않은 상황, 3대 세습이 슬슬 굳혀지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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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임용한 교수 의견을 인용하며 "강화도로 못 간게 아니라 안 간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내보인 적이 있습니다. 일단 지금은 "못 했다"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고려를 완전히 점령하거나 파괴할 병력 역시 안 투입시킨 게 아니라 투입시키지 "못" 한 쪽으로요.

 후에 쿠빌라이 칸은 일본 정벌을 요구하면서 "니네 병력 5만 있다매? ㅡㅡ"라고 합니다. 이게 단지 윽박지르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 게 여러 차례 현지 다루가치와 주둔군 외에도 계속 사신을 보내 고려의 병력을 살폈거든요. 그 상황은 절망적이었죠. orz;;; 뜯다 뜯다 고려가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쌀 2만 석을 원조해 주기도 했습니다.

 헌데 이들은 수십 년 동안 고려 전국을 파헤쳤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5만 병력을 믿었다는 것, 이것을 바꿔서 말 하면 강화도에 그 정도의 병력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겠죠. 

 강화도를 아예 못 건넌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진도 토벌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아해의 물에 대한 두려움 등을 보면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그리고 안전하게 옮길 정도는 안 됐다고 봐야겠죠. 다시 말 하면 "강화도에 있을 5만의 고려 정예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는요.

 아직은 제 생각 단계긴 하지만, 몽고는 고려를 꽤 과대평가한 것 같습니다. 후에 차라대 역시 강화도로 가는 조운로를 끊으려 했지 강화도로 직접 상륙할 생각은 못 했으니까요.

대몽항쟁 - 14. 끝이 아닌 끝 대몽항쟁

1. 최씨도 몽고도 싫다
1237년 봄, 그나마 별 피해 없이 있던 전남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걸 이끈 건 담양의 이연년 형제였죠. 그들은 여러 세력을 확대하며 해양(광주) 등을 격파했고, 주변의 수령들은 맞서 싸우지 못 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달랬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이를 진압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고, 강화도에서도 중앙군이나 야별초를 파견하지 않았죠. 하지만 여기가 반란군의 손에 다 떨어지면 강화도는 완전히 고립됩니다. 거기다 이들은 스스로를 백적도원수라 칭하며 백제 부흥을 외쳤습니다.

여기에 파견된 사람은 단 한 명, 하지만 그 무게감은 당시 고려의 그 누구보다 더 강했습니다. 귀주성의 영웅 김경손이었죠.

나주에 상륙한 그는 우선 나주 주변의 군현 사람들을 모읍니다. 최우가 그에게 병사 한 명도 주지 않았지만 그는 당당했고, 그가 있던 곳은 나주였죠. 나주가 어딥니까.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 편을 들었고, 왕건의 둘째 왕비 장화왕후의 고향이었습니다. 그 역시 그 점을 강조했죠.

"적이 비록 많으나 짚신을 신은 촌 백성들 뿐이다."

그는 주변의 향리들을 모으고 30명의 별초를 뽑은 후 이렇게 말 합니다.

"너희 고을은 어향(御鄕)이니 다른 고을처럼 적에게 항복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나주 사람들의 자랑을 강조함과 동시에 절대 항복하면 안 되는 것을 당부한 것이었죠. 그는 근처 산에 제사를 지내며 술 두 잔을 올린 후 "나머지는 적을 토벌한 후에 올리겠다"고 합니다.

주변에서는 병력이 더 모인 다음에 공격하자고 했지만 그는 뿌리치고 나섭니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연년도 긴장했죠. 그들 역시 김경손의 위명을 알고 있었고, 그를 죽이면 여론이 어떻게 돌아갈 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주성을 포위한 후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지휘사는 귀주에서 성공한 대장이라 인망이 매우 중하니 내가 마땅히 산 채로 잡아서 도통(都統)을 삼을 것이니 활로 쏘지 말라"

이 때문에 반란군은 김경손의 토벌군과 싸울 때도 활을 쏘지 않고 칼만으로 상대했다고 합니다. 애초에 병력에서도 크게 차이가 났을 테니 자신만만했던 거겠죠. 하지만, 김경손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반란군에는 용맹을 뽐내는 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혼자 돌격해 오며 일기토를 요구합니다. 이에 박신유라는 자가 나서서 이렇게 말 하죠.

"내가 저 미소년을 사로잡아 메고 돌아오겠다."

아마 막 사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만, 그는 몇 차례 칼이 오간 후에 발길질로 넘어뜨린 후 목을 베어 돌아옵니다. 다만 고려사에서는 이연년이 직접 김경손을 설득하러 왔고, 이 틈을 타 김경손이 돌격 명령을 내려 대승을 거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란은 쉽게 끝나죠.

흥미로운 점은 몽고군이 전라도까지 약탈하는 과정에서도 몽고와 손을 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최우가 육지를 버렸기에 일어난 것이었죠. 하지만 최우의 대응은 강화도에 외성을 쌓는 것 뿐이었습니다.

2. 동경은 떨어지고
1237년에 기록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 해에도 몽고의 파괴 공작은 계속됐을텐데 말이죠. 아마 늘 똑같은 일이 벌어져서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소규모 파괴와 약탈은 계속됐고, 백성들은 성에 틀어박혀서 굶었고, 강화도에서는 잔치가 계속됐으며, 죽주를 중심으로 한 경기도 남쪽의 항전이 계속됐기에 섣불리 대군을 보내지도 못 한 상황이었겠죠.

하지만, 그 사이에 경상도가 뚫려 버립니다.

1238년 4월에 동경(경주)에 이른 몽고군은 그 유명한 황룡사를 불태웁니다. 이 때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죠.

"이때에 몽고 군사가 지경 안에 가득 차서 멀다고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왕래하는 것이 수년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백성들은 산성이나 해도(海島)에 들어가서 목숨을 보전하고, 조정은 강화도에서 안락만을 탐하고, 외적을 물리치고 막을 계책을 생각하지 않아서 이로 말미암아 몽고 군사는 더욱 제멋대로 횡행하였다."

원사에서는 이 때 조현습, 이원우가 2천명을 이끌고 항복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경상도로 대군이 밀어닥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었겠죠. 당고는 그들에게 동경을 맡기고 홍복원의 명령을 듣게 합니다. 후에 이군식이 수하를 이끌고 항복하는데 이들에게도 비슷한 대우를 해 줬다고 하죠.

전라도의 반란에 이은 경상도의 투항, 몽고는 이렇게 개경과 서, 남, 동의 3경을 모두 손에 넣기에 이릅니다. 이에 결국 조정에서는 gg를 치죠. 그 해 12월이었습니다. 기록에 정확히 명시돼 있진 않지만, 이 즈음엔 외롭게 항전하고 있는 섬들 이외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도 적들이 꽤나 들어차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들이 굶어 죽을 상황이 됐기에 화친을 시도한 것이겠죠.

사신으로 선택된 이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 그 내용을 추리면 이렇습니다.

- 소국이 대국에 의탁하는 게 맞는데, 항복한 다음에도 막 쳐들어 오니까 어쩌겠어요.
- 백성들이 농사를 못 지으니 공물을 진상할 수도 없고 슬프네요 ㅠㅠ
- 이대로 돌아가 주시면 매년 공물 조금이라도 바칠 테니까 믿고 돌아가 주세요.

몽고에서도 별 수 없이 이를 들어주게 됩니다. 더 이상 파괴할 것도 없었고, 더 제대로 하자니 곳곳의 성이 가로막고, 전진하자니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일어나는 상황이 계속됐으니까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몽고군의 피해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던데다 본국의 상황도 그리 잘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바투로 대표되는 서방 원정군과의 갈등이 보이기 시작했고, 남송과의 전쟁으로 고려에 모든 신경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오고타이(혹은 우구데이) 칸 자신이 늙어갔죠. 고려에서도 농사를 짓지 못 하는 마당에 더 이상 뜯을 것도 없었구요.

1239년, 전쟁 5년차부터 몽고군의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됩니다. 이 해 4월에 보아가질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전군 퇴각을 시작하죠.

이 해 5월에 왕태후 유씨가 죽습니다. 고려는 이를 핑계로 삼아 고종의 입조를 거부합니다. 짜증은 났지만 왕의 어미가 죽은 것 자체야 사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_-; 입조를 요구하는 사신이 계속 고려를 드나들었고, 이들에게 선물로 준 양도 컸습니다. 어쨌든 공물은 바쳐야 했으니 그 양도 어마어마했죠. 이 모든 게 다 육지에 남은 이들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결국 몽고의 요구를 이기지 못 한 최우는 신안공 왕전을 보냅니다. 대신 친조만은 죽어도 안 되겠다고 했죠. 급기야 몽고는 1240년, 다시 들어오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창주, 삭주에 둔 치면서 친조를 요구했죠. 다음 해에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영녕공 왕준을 고종의 아들로 속여서 보냅니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으면서 양국의 갈등은 조금이나마 풀립니다. 고려는 둘째 치고 일단 자기네 집안 정리부터 해야 했으니까요.

+) 참고로 동명왕편 등으로 유명한 지식인 이규보도 이 해 죽습니다.

이렇게 3차 침공은 완전히 끝납니다. 하지만... 그 피해가 대체 얼마나 됐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죠.

3. 그 후
"제6후 내마진씨가 칭제(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행하는 것)하고 정사를 보자 5~6년 동안 병란이 조금 그쳤었다."

혼란 끝에 칸이 된 것은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귀유, 혹은 구육)였습니다. 그 때에 이르러 바투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그는 물론 툴루이의 아들인 몽케, 쿠빌라이와의 갈등도 시작됐죠. 그 동안 고려에 대해서는 관심이 비교적 덜 했습니다.

하지만 몽고의 사신은 계속 드나들었습니다. 공물을 뜯어가려는 것이었죠. 집안 정리가 안 된 판에 고종의 입조는 뒷 문제였고, 공물 뜯어가는 것에 더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적고 있죠.

"이때에 양국 사신의 왕래는 일정한 한도가 없어서 혹 1년에 4~5차례였었는데, 몽고 사신이 올 때면 일행이 걸핏하면 몇 백 명이 되었으므로, 그들을 접대하고 주어 보내니 재물을 낭비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 사신이 갈 때도 진상하는 방물과, 그들 대관인에게 보내는 뇌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공사의 축적이 텅텅 비었다."

그런 상황에서 육지에 제대로 신경을 써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동북면 백성들을 울릉도로 옮기려다 만 게 다였죠.

1244년, 여유가 생겼는지 이번엔 또 다른 일을 벌입니다. 안양산의 잣나무를 옮겨 자기 집을 꾸민 것이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얼어죽고 이를 피하려 산으로 돔아치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방문이 문에 붙여질 정도였죠.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 쪽이 중한가?"

범인은 잡히지 않은 모양입니다.

고종 역시 이런 상황에서 아무 힘을 쓰지 못 하고 최우를 공으로 올려줄 따름이었죠. 연등회는 끊이지 않았고, 전쟁이 없자 스케일도 커져서 비단으로 장막을 두르고 그네에도 비단과 꽃으로 장식을 합니다. 거기에 은단추로 꾸민 화분에 얼음조각으로 장식을 하기도 했죠. 이 때 동원된 기생, 무희, 악사 등이 무려 1350명, 육지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는 가운데 이들은 상으로 비단과 금을 받았습니다.

1246년에는 시중 최종준의 집을 지어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구 붙잡아 노역을 시켜 단 이틀만에 끝났다고 합니다. 5월에는 절에서 잔치를 하며 6개의 큰 상에 칠보로 장식한 그릇들을 동원했고, 이 때 최우는 이렇게 즐거워했죠

"장래에라도 어찌 오늘처럼 할 자가 있겠는가?"

아 예 -_- 사관은 이 시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팔방상은 나라가 태평할 때의 성사이다. 이제 병란을 피하여 섬으로 쫓기어서 사직을 겨우 보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군신이 한결같이 근심을 같이하여 못의 얼음을 건너는 것처럼 하여야만 할 때였는데도 최이는 나라의 권력을 도둑질하여 망령되이 과장하고 성대한 것을 자랑하였으니, 그 죄는 주륙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무렵, 최우는 최이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나마 평화가 찾아온 가운데, 이목은 그의 후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4. 3대 세습을 향하여
최이(최우)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최환이라는 자를 특히 아꼈다 합니다. 그는 원래 임씨였는데 양아들로 맞았었죠. 글씨를 잘 써 최이는 물론 고종도 그를 아꼈다 하지만, "성질이 급하고 비루하였으며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횡포를 부렸다"고 합니다.

한편, 최이가 눈여겨보고 있던 것은 서자로 출가한 만중과 만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닮아 참 오만방자했습니다. 나라의 역참을 마음대로 쓰며 곳곳을 약탈했는데 몽고군의 복식을 입고 했다고 하며, 쌀 50여만석을 가지고 고리대금업을 했다고 합니다. 빚 독촉이 너무 혹독해 가진 걸 다 바치고도 갚지 못 했고, 세금도 내지 못 할 정도였죠. 보다 못한 진주 부사 왕해가 이런 명령을 내렸죠.

"백성들이 조세를 바치지 못하였는데, 먼저 사채를 독촉하는 자는 죄를 주리라."

그나마 이것으로 조금 나아졌지만, 그들의 횡포는 끝이 없었쬬. 오죽하면 최이의 측근인 박훤(이전에는 박문수)이 최이에게 그들을 죄 줄 것을 청합니다.

"지금 북병이 여러 해 계속 침략해 와서 민심이 불안하여 비록 은덕으로 어루만진다 해도 오히려 변이 생길까 두려운데, 지금 만종과 만전의 문도들이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아서 원망을 사는 일이 실로 많으므로, 남쪽이 소란합니다. 만약 몽고 군사들이 이르면 다 배반하여 저들에게 투항할까 염려됩니다"

최이는 이를 듣고 고민했고, 송국첨이란 자도 남부 지방을 돌아보며 그 비리를 최이에게 알립니다. 그나마 그들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로 결론이 나죠. 하지만 벌을 주려 할 때 만전 등은 최이에게 울며 이렇게 말 합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이같이 압박을 당하니, 만약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 형제는 죽을 곳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을 고발한 박훤과 송국첨은 귀양 갔고, 만전에 대한 최이의 신뢰는 깊어 갔죠. 1247년, 그가 환속하여 이름을 얻으니 바로 최항입니다.


사진은 본문과 큰 상관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최충헌 때 이미 벼슬살이를 하며 인지도를 얻고 후계자로 키워진 최이와는 달리, 최항은 서자에 땡중 출신으로 아무런 배경도 능력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최이는 그를 후계자로 밀어주었죠. 정통성과 능력은 대를 갈수록 떨어져만 갔고, 최항의 시대는 최우 때보다 더 한 막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46년에 마침내 칸의 자리에 오른 구유크는 다시 고려를 노리기 시작합니다.

오고타이에 이은 구유크 칸의 출현, 최이에 이은 최항의 출현... 전쟁은 계속됩니다. 8년의 공백은 그저 휴전이었을 뿐, 평화는 못 되었죠.

대몽항쟁 - 13. 우리는 싸운다 대몽항쟁

 +) 잡담 하나 올렸을 뿐인데 밸리에 계속 떠 있네요 ( ..);;;

1. 혼돈과 파괴
1235년 7월, 몽고군이 동진국의 병력을 동원해 안변에 들어옵니다. 그 어떤 경고도 요구도 없이 그냥 들어온 것이었죠. 조정에서는 긴장하며 남경, 현 서울과 경기도 광주의 백성들을 강화도로 오게 합니다.

2차 침공 때까지 주요 전장은 서쪽이었습니다. 동북면은 심심할 때마다 (몽고와의 전쟁 중에도 -_-;) 동진국이 쳐들어오긴 했지만 소수였고 피난을 떠날 정도는 못 됐죠. 그래서 동북면은 아직도 별 피해 없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동계병마사에게 병력을 모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부족이었죠. 동북면이 전장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곧 태백산맥 동쪽을 이용해 경상도로도 쉽게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뜻 했습니다.

한편 서북면에서도 침공은 시작됩니다. 곧 용강, 함종(평북 강서), 삼등(평북 선천)의 세 고을이 함락됩니다. 항복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모두 죽이고 불태웠을 뿐이었죠. 원사에서는 이 세 성을 비롯한 북계의 10여성이 함락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때의 몽고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됐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군으로 성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파괴하는 동시에 소규모 부대로 전국 곳곳을 찔러 약탈과 파괴, 방화를 일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상도로 향한 몽고군의 별동대는 안동으로 향합니다. 이 때 안동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고장이 파괴될 바에야 아예 항복해서 다른 곳을 치게 한 것이었죠. 타겟이 된 곳은 동경, 경주였습니다. 다만 소수라서 그리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듯 합니다.

강화도에서는 이에 아무런 대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문무백관을 모아 해에 절 하며 저들이 돌아가길 빌 뿐이었죠. 팔만대장경의 두번째 버전인 재조대장경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전국의 미납된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는데, 어차피 전쟁 중에 세금을 걷는 것도 무리였고, 어디까지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차원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이를 보다 못 한 야별초 도령 이유정이 나섭니다. 자기라도 육지로 가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죠. 하지만 최우가 그에게 준 병력은 160명밖에 안 됐습니다. 그는 그 소수 병력이라도 이끌고 싸웠고, 해평(경북 선산)에서 맞서다 전멸합니다. 이외에도 야별초가 경기 양평에 상륙해 몽고군을 기습하기도 했습니다. 삼별초의 전신 야별초가 역사에 제대로 이름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죠.

이런 가운데에서 동북면에서는 용진진, 진명성(함남 덕원) 등이 차례로 함락됐고, 서북면에서는 동주성(황해 서흥)이 파괴되는 등 꾸준한 진격이 계속 되고 있었죠. 전방도 후방도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적도 아군도 그 구별이 제대로 안 됐을 겁니다. 남은 이들은 그저 자기가 살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고종과 최우도 별 다른 방법을 찾지 못 했습니다. 몽고는 사신을 보내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저 계속 파괴를 할 뿐, 몽고군 총대장이 어디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대신 야별초를 곳곳에 상륙시키며 강화도에 오는 걸 사전에 차단할 뿐이었죠. 거기에 대궐의 북쪽에 집 한 채를 지어 기도하면 몽고군이 물러날 거라는 일관의 말을 따르고, 각 주, 군의 병력을 강화도로 오게 해서 -_- 제방을 늘릴 뿐이었죠.

육지에서 지옥도가 펼쳐지고 강화도에서는 나몰라라 하는 동안 어느 새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1236년 2월, 조정에서는 조촐한 잔치를 열었는데, 이 때 채송년이 "송경인이 처용무를 잘 춘다"고 합니다. 이에 그가 술 마시고 직접 처용무를 추었다고 하죠. 여기에 고려사는 이런 말을 집어넣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참고로 몽고군이 들어온 상황임에도 연등회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2. 점입가경

지도가 개판인 이유는 그만큼 전국이 개판이 돼서 -_-; 사실상 현 경상남도랑 전라남도 이외에 몽고군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은 없을 것 같네요.

그 해 6월, 몽고의 증원군이 압록강을 건넙니다. 총대장 당고가 이끄는 주력군이었죠. 그는 아직 남아 있던 가주(평북 가산)와 안주를 불태웠고, (그 불길이 하늘에 닿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진을 칩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국에서는 파괴가 계속되고 있었죠. 교주도에서는 몽고군 50여기가 들어와서 약탈을 계속했는데, 2차 침공 당시 낙오됐던 병력들이 여기 합류하면서 대규모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이를 고려군은 "감히 막아낼 수 없었다"고 하죠.

+)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이나 다름 없던 야율유가도 이 때 고려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6월 5일 몽고의 본대는 차근차근 남하해 그 선봉이 13일에 황주로 들어왔고, 15일에는 안주에 본진을 칩니다. 이쯤 되자 조정에서도 아예 나몰라라 할 수 없어서 전국에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큰 병력 지원 없이 몸만 간 수준에다 거의 죽을 길로 몰린 것이니 이들이 열심히 싸우길 기대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그 중에도 싸우려는 자가 있었고, 그들은 각 지역에서 각자의 활약을 합니다. 특히 서해 쪽에서는 야별초들이 대거 충원돼 어느 정도 해 볼만한 싸움을 한 것으로 보이구요.

꾸준히 남진하던 당고는 중간에 절대 잊지 못 할 곳을 만나게 됩니다. 최춘명이 끝까지 항거했던 자주였죠. 자주 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 부사 김경희 등은 끝까지 맞서 싸웠지만 결국 한 달만에 함락됐고, 복수심에 가득 찬 몽고군은 남은 병사와 백성들을 학살합니다. 대몽항쟁판 2차 진주성 전투인 셈이었죠.

복수를 마친 당고는 계속 남하해 남경, 현재의 서울에 주둔합니다. 여기서 방침이 크게 수정됩니다. 어차피 북부에서 중부 지방은 갈릴대로 갈렸고, 하삼도, 경상, 전라, 충청도를 공략해야 했죠. 소부대가 동해를 타고 경상도로 내려가긴 했지만 말 그대로 소규모였을 뿐입니다. 인구도 많고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의 방어벽으로 둘러쌓인 남부지방을 공격하려면 대군으로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 지역들을 확실히 잡으면 강화도는 굶어 죽는 상황에 빠뜨릴 수 있었죠.

하지만 남하하던 몽고군은 뜻밖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3. 우리는 싸운다
몽고군은 현 죽주, 현 안성시 죽산으로 향합니다. 이 죽주산성은 차령 산맥을 넘으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곳이었습니다. 먼저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죠. 이에 몽고군은 자기들이 갈고 닦은 공성 실력을 보여줍니다.

헌데... 참 이상했죠.



몽고군이 투석기로 신나게 성을 두들기며 성벽 일부가 무너질 정도의 포격을 가하자, 성 내에서도 투석기를 동원해 대포병사격-_-;을 합니다.

이어 기름에 불을 붙여 성 자체를 태워버리려고 하자 (여기서도 사람 기름이라 적고 있습니다 =_=) 갑자기 성문이 열리더니 고려군이 돌격해 왔습니다. 전혀 예상 못 한 저항에 몽고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죠.

그 다음은 참 예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패턴이었습니다. 뭘 해도 막고, 이래도 막고 저래도 막고... 결국 몽고군은 단 15일만에 철수합니다. 5년이나 이어진 전쟁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쉬운 포기였죠. 귀주성의 악몽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박서나 김경손이 거기에 있었던 걸까요?

그 때 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방호별감으로 파견된 송문주, 별 이름 없는 장수였지만 그는 아주 중요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주성에서 버틴 5개월, 그는 당시 귀주성에서 함께 싸우면서 몽고군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은 적이 반드시 어떤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의당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 내에서 작전을 짜서 대응했기에 그 방법은 정말 효율적이었고, 그 대응 방식 역시 귀주성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한 차례 더 진보한 것이었기에 큰 피해 없이 무난히 성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성 안에서도 이것을 신기하게 여겨 모두 그를 "신명(神明)하다"고 칭송했다고 하죠.

참고로 귀주성 전투 이후 은퇴했던 박서의 고향이 이 죽주였습니다. 그가 언제까지 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참 신기한 일이죠.

저항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됐습니다. 개주(평남 개천)에서는 중랑장 명준과 야별초 교위 희경이 매복 후 기습해서 이겼고, 이후 몽고군은 개천에는 손을 대지 못 했습니다. 이외에 장주 낭장 광대, 석도(대동강의 하중도) 방호별감 등이 게릴라전을 펼쳐 이기고 포로 두세명씩을 강화도로 보내기도 했죠. 자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야별초 지유 이임수, 박인걸 역시 백명씩을 이끌고 몽고군에 맞서기 위해 상륙합니다. 죽주 근처의 온수(온양)에서도 아전인 현여가 성문을 열고 돌격, 대승을 거두었죠.

이 해 10월, 소규모 몽고군이 차령산맥을 넘어 전주에까지 이르지만 여기서도 반격을 맞게 되죠. 부령(전북 부안)에서 의업(의과-_-a)에 응시했던 전공렬은 매복했다가 공격해서 승리를 거뒀고, 이 공으로 진짜 의사가 됩니다. 박인걸은 공주에서 몽고 군사를 만나서 패하기도 했죠. 대흥성(충남 예산)에서는 약탈하러 온 몽고군에 대항해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돌격해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기 살기 위해, 나라를 위해, 하다못해 강화도에 상륙하지 못 하게 해서 최씨 정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싸웠습니다. 전국을 불태우며 남하하던 몽고군은 결국 막히게 됩니다. 소규모 부대의 약탈은 이미 태울 대로 태워버려서 큰 효과를 보지 못 했고, 오히려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온수와 죽주에서의 승리로 대군이 남하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기록에 명시돼 있지 않을 뿐, 이 3차 침공은 매년 한 차례씩 총 4번의 침공을 합한 거라고 합니다. 임용한 교수는 이렇게 각 침공을 나누며 몽고군의 공세한계점을 지적하죠. 여름부터 겨울까지 약 반년,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기간 동안만 공격할 수 있고, 봄이 될 무렵에는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최씨 정권이 노린 게 이거였다고 그는 지적하죠.

 6차 침공을 보면 이게 꼭 맞은 것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외가 있으니 3차 역시 이렇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거라 보구요. 다만 몽고군이 들락날락거린 건 맞는 것 같습니다. 1235년부터 1239년까지, 각 해마다 약간씩 다른 전황을 볼 수 있거든요.

 확실한 건 이 때 몽고군은 고려의 완전 파괴나 완전 점령할 능력은 못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과 남송 등에 신경 써서 못 한 건지, 고려를 얕보고 안 한 건지의 문제가 걸리죠. 임용한 교수는 또 강화도가 아무리 가기 어렵다 하더라도 갈 시도 자체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보입니다. 전 아니라고 보지만, 이렇게 보자면 3차 침공은 정말 어이가 달아날 지경입니다. -_-;

 다시 정리하자면 몽고는 5년 동안 고려에 제대로 된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고, 굳이 수군까지 동원해 강화도 칠 필요 없이 밖에서 신나게 약탈이나 했다는 얘기거든요.

 에휴 -_-... 어느 쪽이 맞든 몽고는 매년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두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 합니다. 각 지역의 항전, 후방의 게릴라 등에 부딪쳤고, 애초에 강화도를 치지 못 하는 상황에 확실한 전략적 목표도 없이 피해만 입는 상황이었죠. 이제 남은 건 누가 더 오래 버티나의 싸움이었습니다.
 
 당고는 우선 남경에 머물러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규모 부대의 준동은 계속됐고, 고려의 게릴라전도 계속되고 있었죠. 적도 아군도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느냐의 신경전으로 옮겨갔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도 계속 피해를 입으며 농사도 짓지 못 했던 일반 백성들을 인질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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